한국 화폐단위 변경 절실한가/미국 롱아일랜드대 교수
2004.09.23 11:56
수정 : 2014.11.07 13:38기사원문
국민들의 심리적 혼란이 이루말할 수 없다. 600여년 살아온 수도를 옮긴다, 과거사를 청산하고 근대 역사를 다시 쓴다, 재산세를 비롯한 세제를 개편한다, 50여년을 지녀왔던 주적 개념을 포함한 보안법을 폐지한다는 등등의 초대형 국책과제가 한꺼번에 쏟아지고 있어서다. 뿐만 아니다. 이 상황에서 40여년간 사용해온 화폐까지도 바꾸자고 하고 있다. 한 국가의 상징인 수도와 화폐를 바꾸는 논의를 동시에 하는 나라는 세계사 속에서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전쟁이나 혁명 직후에나 있을 법한 일이다.
얼마 전부터 한국은행 총재와 경제부총리는 약속이나 한 듯이 입을 맞춰 화폐단위변경 가능성을 언급하기 시작했다. 이로써 그 어느 국책과제보다도 메가톤급 위력을 갖는 화폐단위변경 논의가 본격화되고 있다. 이르면 내년 9월부터는 새 화폐를 언제든지 찍어낼 수 있다고 한다. 화폐개혁은 전국민의 재산권과 직결된 문제다. 여러 학자와 전문가들의 열띤 논의에서 언급되었듯이, 이론적으로는 긍정적인 면도 상당 부분 있다.
화폐가치의 선진화만 해도 그렇다. 현재의 화폐단위가 채택된 지난 1962년에 비해 국내총생산은 2100배 이상, 소비자물가는 50여배가 올랐다. 따라서 우리 경제의 몸집에 비해 맞지 않아 여러 모로 불편했던 것도 사실이다. 세계의 기축통화인 미국 달러에 비해 1200배나 되는 단위가 주는 부담감을 덜고 자국 통화의 국제적 위상 제고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이밖에 고액권 발행, 위폐 방지 등의 문제도 함께 해결할 수 있다. 또한 인플레이션에 대한 일반인들의 기대 심리를 억제하는 효과가 나타날 수도 있고 지하로 숨어버린 자금들을 양성화시킬 수도 있을 것이다. 이 모두가 경제의 선순환을 유도할 수 있는 핵심적인 요소들이다. 자판기, 현금인출기를 비롯한 사회시설과 전산망의 교체 및 새 돈의 인쇄 등 화폐단위변경에 따른 모든 사회적 비용을 감안하더라도 장기적인 관점에서 보면 꼭 필요한 일이라는 데는 이견이 있을 수 없다.
문제는 현재 우리 경제의 체력과 국민들의 심리상태가 이를 논의하고 받아들일만큼 여유롭지 못하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화폐단위변경에 따른 부작용을 최소화하고 목표했던 효과를 얻으려면 다음과 같은 몇가지 요건이 충족된 시기에 실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첫째, 물가가 안정된 시기에 실시하여야 한다. 몇몇 중남미 국가들이 하이퍼 인플레이션에 대응하기 위한 조치의 일환으로 실시했으나, 물가가 상승하는 시기에는 이에 편승한 부당한 가격 인상이 초래되기 쉽고 이는 본래의 목적을 반감시킨다. 둘째, 국제수지가 안정적인 시기에 실시하여야 한다. 경상수지가 적자를 계속 유지하고 있을 경우 환율이 안정을 유지하기 어려우며 이 시기의 화폐단위변경은 환율의 불확실성을 더욱 확대할 우려가 있다. 셋째, 경기가 좋고 기업의 수익이 양호한 시기에 실시하여야 한다. 화폐단위변경의 실시에는 여러 직간접적인 비용부담이 유발되기 때문에 이를 손쉽게 흡수할 수 있는 경제여건이 필요하다.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국내 정치와 사회정세가 안정된 시기에 실시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화폐단위변경에는 논란의 소지가 많고 실시 결정에서 완료시까지 오랜 시일이 소요되기 때문에 국민의 신뢰가 무엇보다 긴요하다.
지금의 우리 경제는 누가 봐도 자신감을 잃고 있는 상황이다. 국민의 60%가 지금의 경제사정이 외환위기 때보다도 어렵다고 하며 80% 이상이 앞으로의 전망도 부정적으로 보고 있다. 6분기째 소비가 내리막길을 걷는 것은 사상 최장기간이라고 한다. 근래에 발표되는 여러 경제 지표들도 이를 반영하고 있다. 배럴당 50달러를 육박하는 국제원유 가격은 가뜩이나 어려운 경제에 찬물을 끼얹고 있다. 씨티그룹과 피치는 올 한국의 경제 성장률이 4% 아래로 떨어질 가능성이 있다고 경고한다. ‘더블 딥’, ‘ L자형 장기불황’과 ‘스태그플레이션’ 등의 경기악화를 점치는 온갖 전망들이 혼재한 형국이다. 이에 비하면 한국은행과 한국개발연구원(KDI)의 경제성장률 5%로의 하향조정은 여유로워 보인다. 한마디로, 화폐단위변경은 뜻도 좋고 방향도 맞지만 지금은 그것을 논의할 시기가 아니다. 정부가 아무리 긍정적인 의도를 가지고 있다 해도 지금과 같이 경기가 극도로 침체된 상황에서 국민이 느끼기에 그토록 절실하지도 않고, 그다지 긴급하지도 않은 화폐단위변경을 공론화하는 것은 국민의 심리적 불안감만을 가중시키게 될 것이다. 실물경기를 회복시키는 것이 우선이며 이를 위해서는 정책의 우선 순위가 무엇인지를 숙고하여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