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금융기관 430개 몰려 ‘EU 전초기지’
2005.03.21 12:45
수정 : 2014.11.07 20:12기사원문
【더블린(아일랜드)=이민종·천상철기자】지난 1일, 봄의 시작인 3월의 첫날이 무색할 정도로 더블린의 새벽하늘은 매섭게 내리는 눈발로 가득찼다. 그러나 호텔 문을 나설 무렵인 오전 9시께의 하늘은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화창하게 개어있었다.
숙소에서 멀지 않은 곳의 오코넬 거리로 향했다. 더블린에서 가장 큰 거리인 이곳을 걷다 보니 호텔, 백화점, 은행 등이 줄지어 눈에 들어왔다. 그야말로 서울의 명동이라 불릴만했다.
10분쯤 걸었을까. 스테인리스 철구조물로 된 바늘 모양의 뾰족한 탑 하나가 시선을 끌었다. 120m짜리 이 구조물의 이름은 ‘더블린 스파이어’. 아일랜드 정부가 지난 10년간의 고속성장을 기념하기 위해 2003년에 세웠다고 한다. 원래 이 자리에는 영국의 넬슨 제독 동상이 서 있었지만 아일랜드 정부가 영국보다 먼저 1인당 국민소득 3만달러(2002년 기준 3만1298달러)를 넘어선 기념으로 여기에 상징탑을 건립했다.
이곳을 지나 남쪽으로 더 내려가니 단숨에 건널만한 오코넬 다리가 나타났다. 이 다리 밑으로 힘차게 흐르는 강의 이름은 ‘리피강’. 리피강을 사이에 두고 강북은 신시가지, 강남은 구시가지로 구분된다고 한다. 신시가지는 18세기 이후에 개발돼 현대적인 빌딩이 많고 구시가지에는 트리니티 대학과 더블린 성, 시청 등 고풍스러운 건축물들이 즐비하다.
유럽인들은 80년대 후반까지도 못사는 나라 아일랜드의 비약적인 발전을 두고 ‘리피강의 기적’이라고들 한다. 우리나라 한강의 기적과 견줄만한 경제성장의 원동력은 무엇이었을까.
◇‘유럽의 지진아’에서 ‘켈틱 타이거’로=‘켈틱 타이거(Celtic Tiger)’는 영국의 인근 지역을 지칭하는 켈틱의 호랑이란 뜻으로 아일랜드를 일컫는 별칭이다. 모건스탠리가 90년대 아일랜드의 경이적인 경제발전을 아시아의 한국, 대만, 싱가포르, 홍콩 등 네 마리 호랑이에 비유한 것에서 유래된 말이다.
지금은 1인당 국민소득이 4만달러에 육박하는 아일랜드지만 80년대까지의 역사는 가난의 연속이었다.
19세기 중반 ‘감자 대기근’으로 인구 800만명 가운데 무려 100만명이 굶어죽었고 700년간 영국의 식민지배를 받으면서 변변한 공장 하나 갖지 못했다. 아일랜드는 70년대 말 2차 석유파동(오일 쇼크) 이후 급격히 내리막 길을 걸어 87년에는 부도 위기에 내몰렸다. 당시 물가상승률은 20%대에 달했고 실업률은 17%를 넘었다.
이때부터 아일랜드는 달라지기 시작했다.
우선 87년 시작돼 현재까지 3년 단위로 이어지고 있는 ‘사회연대협약(Social Partnership·노사정 대타협)’을 통해 대대적인 국가 개조에 나섰다. 특히 정부는 적극적인 외자유치 노력을 통해 역사상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놀라운 경제성장의 신화를 만들었다.
그 결과 지난해엔 영국 주간지 이코노미스트가 전세계 111개국을 대상으로 ‘2005년에 가장 살기 좋은 나라’를 조사한 결과, 경제력 증가와 전통적 가치가 조화를 이뤘다는 이유로 아일랜드가 1위를 차지했다.
◇세계 최저수준 법인세로 외자유치 유인=더블린 남쪽에 있는 정부청사 ‘윌튼 파크하우스’. 외국기업 유치 업무를 맡고 있는 아일랜드산업개발청(IDA) 등 정부기관이 입주한 청사 입구에 서 있는 간판에는 눈에 띄는 기업 이름 2개가 적혀 있다. 로펌인 ‘휘트니무어 앤드 켈러’와 컨설팅 회사인 ‘프라이스워터하우스쿠퍼스(PWC)’.
투자를 위해 찾아온 외국기업에 인허가에서부터 법률 및 회계자문 등에 이르기까지 원스톱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서 건물에 입주시켰다고 한다. 우리 기준으로는 정부과천청사 안에 민간기업이 들어와 있는 이 같은 동거가 어색해 보이지만 이 나라에서는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한다.
농업 이외엔 변변한 산업기반이 없었던 아일랜드 정부는 외자유치에 사활을 걸었고 IDA가 선봉에 섰다.
IDA는 법인세를 10%로 낮췄다. 영국과 프랑스 등 인접국가의 법인세가 30∼40%인 점을 감안하면 파격적인 조건이다. 지금은 12.5%로 약간 높아졌지만 기존 투자기업에 대해선 2005년 혹은 2010년까지 그대로 10%를 적용받는 다고 했다. 또 주요국가와 이중과세방지 협약을 체결해 기업이 법인세를 이중으로 내지 않도록 했으며 공장설비와 건물 토지 구입에 들어가는 비용의 25∼35%를 정부 보조금으로 지원했다.
변변한 중공업 시설 하나 없던 아일랜드는 특히 금융기관과 정보기술(IT) 기업 유치에 전력을 다했다. 더블린 시내 동쪽 커스톰 하우스 둑에 위치한 더블린 국제금융센터(IFSC). 원래 이 지역은 낡은 보세창고가 있던 장소였지만 지난 87년 15만평 부지에 초현대식 종합금융센터가 들어섰다. 이곳에는 씨티은행, AIG, 메릴린치, JP모건, ABN암로 등 내로라 하는 전세계 430개 금융기관들의 유럽 전초기지가 몰려있다.
1만명 이상이 이곳에서 근무한다고 하니 고용효과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다. 아일랜드 중앙은행에 따르면 이들 기관의 2003년말 현재 자산규모만 400조원에 이른다고 한다. IFSC에는 사무실은 물론이고 호텔, 레스토랑, 공연장까지 갖추고 최상의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IFSC 홈페이지(www.ifsconline.ie)에는 숙박, 교통, 여행 정보는 물론, 심지어 중고차 매매까지 알선해준다.
◇영어 구사능력과 젊은 인구 비중 높아=아일랜드는 국민 대부분이 영어를 구사한다. 그것도 영국식 발음보다는 미국 발음에 가깝다. 물론 아일랜드 고유말이 있지만 잘 사용하지 않는다고 한다. 이 같은 영어구사 능력은 국제금융과 IT 중심지가 되는데 큰 역할을 했다. 이곳에 씨티은행, 마이크로소프트 등 미국기업들이 몰려 있는 점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세계 최고수준의 양질의 노동력도 강점이다. 아일랜드는 25세 미만의 인구가 전체 인구의 25%에 육박할 만큼 젊은 국가다. 또 전문대학 이상 졸업 인력비중도 47.85%로 영국 39.46%, 미국 39.06%, 프랑스 34.23% 등 경쟁국가를 압도한다.
노융기 KDB아일랜드 사장은 “낮은 법인세, 영어구사 능력, 젊은 노동력 등 3박자로 더블린은 세계 최고의 역외금융센터가 됐다”며 “우리나라가 동북아금융의 중심지가 되려면 이같은 부분이 고려돼야 한다”고 말했다.
더블린에는 유난히 라운드어바우트(Roundabout)가 많다. 삼거리나 사거리에서 신호등 없이 차량이 소통하는 교통신호체계로 적당한 교통량과 속도에서는 매우 유용하다고 한다. 우리가 추구하는 동북아금융허브는 자금의 원활한 소통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이와 맥을 같이 한다. 외국자본이 모이는 곳, 세계의 금융자본이 한국에 자리를 잡으려면 라운드어바우트와 같은 시스템 마련이 필수라는 생각이 든다.
/ lmj@fn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