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를 마시는 새’ 펴낸 팬터지 작가 이영도…“팬터지는 나만의 창조적 세계”
2005.08.03 13:32
수정 : 2014.11.07 15:42기사원문
‘드래곤라자’를 만화로 읽어본 독자라면 경험했을 것이다. 이미 소설을 읽어 줄거리를 알아도 하얀 드래곤 캇셀프라임이 아무르타트에게 패배해 산화될 때 얼마나 안타깝고 분노가 치밀어 오르는지를. 계속해서 의표를 찌르는 스토리에 독자들은 책을 다 읽은 후에도 등장인물들의 모험을 쉽게 떨쳐내지 못하고 진한 감동에 휩싸이게 된다.
한국 판타지 소설의 선구자인 소설가 이영도씨(33)는 최근 장편소설 ‘피를 마시는 새’를 출간했다. 도서출판 ‘황금가지’에서 이씨를 만난 토요일엔 이미 8권 짜리 세트 수백 개가 인터넷 서점에서 10분도 채 안돼 동이 났고 또한 초판 4만권도 일주일만에 매진됐다. 이후 서울 광화문에서 열린 사인회는 종로까지 늘어선 긴 줄이 줄어들지 않아 2시간여 만에 중단되는 등 이씨가 말했던 “서점 안팎의 사람들이 불편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라는 우려가 현실이 되는 순간이었다.
이영도라는 이름이 한국 판타지 소설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이러함에도 그의 말 곳곳엔 겸손함이 묻어 나온다. “제 소설을 읽는 독자들에게 죄 짓는 기분이에요. 항상 글쓰기가 많이 부족하다는 생각 때문이죠.” 말 자체를 아껴 먼저 얘기를 꺼내는 법도 거의 없다. 다만 그는 예상을 벗어나 간결하고 짧은 대답들을 잘해서 그 말을 두 세번 되짚어 보면 참으로 재밌는 사람이란 걸 느낄 수 있다.
이씨는 자신이 쓴 책을 쌓아 놓고 사진을 찍으며 기분이 어떻냐는 질문에는 “환경 파괴자가 된 느낌입니다. 아마존 강의 나무가 많이 잘렸겠네요”라며 판타지 소설가다운 말을 했다. 실제로 그의 작품에는 나무를 사랑하는 나가 종족과 나무로 종이를 만드는 도깨비의 사이가 좋지 않다는 내용이 있다.
이씨는 지난 98년 밀리언셀러 ‘드래곤라자’로 우리나라 판타지 소설의 서막을 올렸으며 이후 ‘퓨처 워커’, ‘폴라리스 랩소디’, ‘눈물을 마시는 새’에 이르기까지 작품의 폭과 깊이를 더해갔다. “판타지 소설을 쓰게 된 데 특별한 이유는 없어요. 다만 어렸을 때부터 여러 분야의 책을 많이 읽은 것이 소설 창작에 도움이 됐다면 됐겠죠.”
‘하이 판타지(High Fantasy)’는 ‘반지의 제왕’을 쓴 J.R.R. 톨킨을 그 시조로 꼽는다. 톨킨이 주로 북구·켈트 신화를 바탕으로 창조해 낸 환상 세계 미들어스(Middle-earth)를 모델로 한 이후의 작가들이 자신만의 상상을 덧붙이는 관행이 점차 ‘판타지 세계’라는 큰 윤곽을 만들게 됐다.
이씨는 이번 작품에서 톨킨과 마찬가지로 작품 속 세계의 지리, 식생, 언어, 역사를 송두리째 창조했다. 더욱이 가상 역사가 신화적인 선악 투쟁에 그쳤던 톨킨과는 달리 작중 현실로 긴밀하게 이어져 약동하는 과거사와 정치, 산업, 문화적 배경을 치밀하게 구성함으로써 정말로 존재하는 또 다른 세계에 빨려들어가는 듯한 현실감과 긴박함을 준다.
‘피를 마시는 새’는 최대의 스케일, 더욱 원숙해진 필력으로 절대 권력에 맞선 인간의 치열한 투쟁을 그렸다. 분량도 1만 6000매에 달한다. 이씨는 “하루에 분량을 정해놓고 쓰진 않지만 잘 될 땐 200매도 쓴다”고 말한다. 이야기는 레콘 종족의 독립국을 꿈꾸었다 가차없이 토벌당하고 복수심에 차 제국을 유랑하는 ‘황제사냥꾼’ 레콘 지멘과 외눈의 인간 소녀 아실, 그리고 파벌을 지어 황제에게 대항했던 변경백령이 함락된 후 정복자와 피정복자로 만나는 대장군 엘시와 공녀 정우의 두 곳에서부터 시작된다.
‘한국 판타지 소설의 진정한 시작이 이영도부터다’라고 말해도 반대하는 이는 거의 없을 듯하다. 우리 판타지 소설이 세상의 기준이 되는 것도 이영도가 있다면 가능하다(본인은 관심조차 없을지도 모르지만). 순서대로라면 ‘물을 마시는 새’와 ‘독약을 마시는 새’가 출간될 차례지만 이씨는 “현재로서 아무 것도 알 수 없죠. 계획한 것도 없고”라며 말을 얼버무렸다. 하지만 판타지 소설 애호가라면 벌써부터 그의 다음 작품에 가슴이 설렐 것이다.
/ hsjee@fnnews.com 지희석기자
■사진설명="깎기 귀찮아서 놔뒀다"는 그의 긴 머리카락만큼이나 소설가 이영도씨의 창작 깊이는 더해만 가는 듯한 느낌이다. 서울 강남구 신사동 도서출판 '황금가지' 사무실에서 이씨가 자신의 책을 쌓아놓고 포즈를 취했다.
/사진=서동일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