英 연금 부동산투자 논란/안병억 런던특파원
2005.10.20 13:50
수정 : 2014.11.07 12:57기사원문
최근 영국 정부가 연금을 부동산 등에 투자하는 것을 허용하자 빈부 격차를 확대하는 방안이라며 반발이 거세지고 있다. 그러나 이런 조치로 혜택을 누리는 중산층들은 이를 반기며 투자에 적극적이다.
영국의 회계연도는 해마다 4월6일부터 시작된다. 재무부는 최근 21만5000파운드(약 4억원) 정도의 개인이 투자한 연금(SIPP?Self-Invested Personal Plan)을 해외 부동산이나 골동품, 포도주, 금에 투자를 허용키로 관련 법을 개정했다. 이 가운데 가장 각광을 받는 것이 외국의 부동산을 구입해 세를 놓는 상품이다. 물가가 싼 나라의 부동산을 구입, 세를 놓는 경우 세금이 전혀 없다. 이 정도의 돈을 금융기관에 예치할 경우 최소한 20% 정도의 세금을 내지만 해외의 부동산을 구입, 운용하면 전혀 세금을 내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다.
따라서 법 개정이 준비된 올해 초부터 각 금융기관에는 이 상품에 대한 문의가 잇따랐다. 바로 이 날을 기다렸다는 듯이 문의 전화와 방문이 빗발쳤다. 금융기관 관계자들조차 이런 반응에 놀라는 분위기다. 이 상품을 판매하는 스탠더드라이프의 조사 결과에 따르면 상담 고객 3분의 2가 이 상품을 구입하겠다고 대답했다. 이 때문에 최소한 10억파운드(약 1조8000억원)의 세금이 탈루될 것으로 추정된다. 저축예금에 대한 세금을 전혀 징수할 수 없기 때문이다.
벌써부터 금융기관들은 고객들에게 지난해 유럽연합에 가입한 키프로스와 오는 2007년에 가입 예정인 불가리아에 투자를 권유하고 있다. 이 두 나라의 물가가 싸기 때문에 4억원 정도만 있으면 유명 휴양지에 별장 몇 채를 손쉽게 구입할 수 있다. 일년에 세를 놓고 잘 관리하면 몇 천만원은 쉽게 벌 수 있다. 이 때문에 브라질의 리우데자네이루와 중국 상하이까지 부동산 투자 후보지로 떠오르고 있다.
그러나 과연 4억원 정도의 여유 연금을 부동산에 투자할 만한 사람이 누구이겠는가. 영국 런던의 ‘더 시티’라고 불리는 금융서비스 산업에서 일하는 일류 금융인의 경우 연말에 성과급으로 이 정도를 받는 사람들이 있다. 혹은 유복한 일부 중산층이 투자를 할 것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집권당인 노동당내 일부 의원들의 반대가 있었고 제2야당인 자유민주당의 반대가 거셌다. 부자들의 배만 불리고 서민들에게 상대적 박탈감을 주는 연금 개혁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일부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법 개정안은 의회를 통과했다.
영국 정부는 최근 회사 파산으로 연금을 타지 못한 퇴직자에게 2000만파운드의 퇴직금을 대체 지급했다. 예상 탈루 세금의 10분의 1 정도밖에 되지 않는 금액이다. 이런 정부의 조치와 연금 개혁을 비교하며 정부를 비난하고 있다.
특히 노동조합의 비판이 거셌다. 노동조합연맹의 한 관계자는 “현재 각종 연금상품이 부자들에게 유리하게 돼 있는데 이번 개혁은 이런 불평등을 심화시킬 것”이라고 경고했다. 저소득층의 경우 1파운드의 연금을 받기 위해 78펜스를 지불하지만 고소득자는 60펜스밖에 지불하지 않고 있다는 구체적인 자료까지 제시했다.
비난에 직면하자 국세청은 투자한 해외 부동산을 세놓는 경우 세금이 없으나 구매자가 1년에 며칠이라도 사용하면 세금을 지불해야 한다는 임시방편을 제시했다. 그러나 이는 시행이 어렵다는 지적과 금융기관의 강력한 반발에 밀려 이 안을 철회하는 해프닝까지 발생했다.
금융감독위원회는 이제까지 감독을 받지 않았던 개인투자 연금에 대한 감독을 고려 중이지만 아직까지 별다른 결론이 나지 않았다. 영국에서 ‘음모설’하면 정부와 금융기관의 공모라고 생각할 정도로 ‘더 시티’의 로비는 집요하고 강력한 것으로 유명하다.
또 일부 금융기관에서조차 해외 부동산 투자를 경고하고 나섰다. 한 금융기관 관계자는 상담원에게 너무 지나치게 해외 부동산 투자를 권고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예컨대 지난해 유럽연합에 가입한 크로아티아의 경우 물가가 영국의 5분의 1에 불과하지만 이곳 부동산 가격을 제대로 평가하기가 쉽지 않다고 털어놓았다.
최근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자료를 보면 영국은 이 기구 회원국 가운데 빈부 격차가 계속 커지고 있는 나라다. 지난 97년 집권한 노동당의 토니 블레어 총리가 지난 5월 총선에서 승리, 3기 연속 집권이라는 신기록을 세웠다. 그러나 보수당의 마가릿 대처 총리가 실시한 시장의 기능만을 지나치게 앞세운 신자유주의 정책을 답습하고 있다. 이번에 통과된 연금의 부동산 투자 허용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연금운용은 한국뿐만 아니라 영국에서도 엄격한 관리 감독을 받는다. 자칫 잘못 관리하면 혈세가 낭비될 수 있기 때문이다. 영국 정부는 저축률을 높이기 위한 고육책으로 법을 개정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노조의 비판에서 볼 수 있듯 특정 계층만 이롭게 하는 법 개정이라는 비판은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
/ anpye@fn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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