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바네사 벨 ‘욕조’

      2007.08.16 16:39   수정 : 2014.11.05 05:02기사원문


※‘어머니의 자궁’ 으로 회귀 갈망하는 女心

경부 고속도로 어느 휴게소의 남자 화장실에 들어가면, 시원한 물줄기로 콸콸 쏟아지는 폭포수 벽화를 볼 수 있습니다. 그 화장실에 서서 그림 속 굵은 물줄기를 보고 있노라면 자신도 모르게 폭포수처럼 시원스럽게 볼 일을 본다고 합니다. 우스갯소리가 아닙니다. 실제로 이미지는 보는 사람에게 작용하고 보는 사람은 이에 반응하기 때문입니다.

열병환자를 낫게 하려면 졸졸졸 경쾌하게 흐르는 샘물의 그림을 방에 걸어놓는 것이 좋고, 만성 두통이 있는 사람이라면 맑은 공기가 가득히 느껴지는 숲의 그림을 붙이는 것이 효과적입니다. 식욕이 없을 때에는 얼큰한 매운탕 국물처럼 진한 붉은 색 계열로 농도감 있게 그린 그림을 보는 것이 좋으며, 소화가 잘 안될 때에는 소다수처럼 맑은 노랑색으로 묽게 그린 그림이 속을 편안하게 해줍니다.

‘First-Class 경제신문’ 파이낸셜뉴스는 매주 1회씩 ‘미술사학자 이주은의 마음의 감기를 치유하는 명화’를 연재합니다. 현대인은 각종 스트레스로 인해 마음의 감기를 앓고 있습니다.
‘음악치료’와 함께 최근 ‘그림치료’가 대단히 효과가 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이번 연재가 독자 여러분의 마음의 감기를 치유하는 치유제가 되기를 바랍니다. <편집자주>
그림은 색채나 형태를 통해 우선적으로 보는 사람에게 작용한다. 그 다음으로 그림에 담겨진 내용과 의미를 읽게 되면 마음속에서 이차적인 작용이 일어나게 된다. 그림과 이를 보는 사람의 마음에 공감하는 부분이 생겨나기 때문이다. 마음의 상처도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피가 나서 딱지가 앉기도 하고 상처 부위가 덧나기도 한다. 그냥 방치하면 평생 지울 수 없는 흉터를 남기게 된다. 아프고 힘든 이야기에 공감해주는 것, 그것이 바로 마음의 상처를 어루만져주는 첫 손길이다.

사실 필자는 심리학자도 아니고 미술치료사도 아니다. 그런데 이런 글을 쓴다는 것이 마냥 조심스럽지만 용기를 낸 것은 올해 봄에 있었던 경험과 자그마한 깨달음 때문이다. 그림을 보여주는 교양강좌라 어두컴컴한 대형 강의실이었는데도 불구하고 200명이나 되는 수강생들 중에 낯설지 않은 한 얼굴이 환하게 눈에 들어왔다. 신입생이어서 분명 만난 적도 없는 학생이었는데 말이다. 더욱 이상한 것은 내가 어느덧 그 학생의 얼굴을 누군가의 얼굴로 머릿속에 떠올리고 있었다는 점이다. 약 2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서, 고등학교 때 같은 반이던 한 친구의 얼굴이었다. 그 얼굴과 더불어 오래도록 파묻어놓은 기억이 되살아났다.

필자는 사춘기 고교시절을 무난하게 보낸 것 같다. ‘소낙비 오는 운동장을 우산 없이 맨 발로 걸어봤으면’ 하는 엉뚱한 생각 정도나 했을 뿐이었니까. 그런 나에게 한 친구가 “아프다. 몸도 마음도” 하면서 자신의 이야기를 꺼집어 냈다. 자신의 가족사와 이른 첫사랑과…. 그런데 나는 아무 말도 못 했다. 내 수첩엔 괴테와 니체의 명언이 빼곡히 써져 있었지만, 인생이라는 현실 앞에서 어떤 말을 골라야 할지 말문이 막혔기 때문이다. 그땐 난 남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나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서로의 고통을 나눌 마음의 준비가 조금도 안되어 있었던 것이다.

친구는 등을 돌려 나에게서 멀어져갔고 그날 일은 20년이 지난 지금도 나에겐 형언할 수 없는 슬픔으로 남아 있다. 그녀를 까맣게 잊고 대학 초년을 보내고 있던 어느 날 그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나 기억해? 대학생활은 어때? 재미있니? 좋겠다.” 뭐 이런 겉도는 대화만 했던 것 같다. 그리고 얼마 후 우연히 다른 친구로부터 그 친구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집에서, 욕조 안에서, 그 애 엄마가 발견했대.”

그녀의 이야기를 쓰다 보니 ‘욕조’라는 그림이 떠올라서 잠시 소개한다. 영국 블룸즈버리 그룹의 바네사 벨(버지니아 울프의 언니)이 그린 그림이다. 벨이 그린 그림에서 뻣뻣하게 정면으로 서 있는 여인의 모습은 관능적인 나체와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그림 속 여자는 욕조 옆에 서서 자기 생각에 몰입한 듯 머리를 땋고 있다. 전체적으로 침침한 색조의 그림 속에서 중앙에 놓인 꽃병이 유독 뚜렷하게 눈에 들어온다. 그 꽃병은 마치 여인의 심장이기라도 한 듯 새빨갛다. 꽃병에 꽂힌 꽃의 줄기는 맥없이 쳐져 있다. 여인은 아마도 마음이 힘든 상황인 것 같다. 20년 전에 내 친구도 그랬을 것이다.

종교학자 미르치아 엘리아데에 의하면, 물에 들어가는 것은 존재하기 이전의 미분화 상태로 돌아가는 것을 상징한다고 한다. 마치 어머니의 자궁 안으로 다시 들어가는 것과 같다. 벨의 그림에서 여인이 들어가려고 하는 욕조는 양수로 가득 찬 둥그런 어머니의 자궁인지도 모른다. 목욕은 몸과 마음의 더러움과 슬픔을 녹여버리고 깨끗하고 새롭게 다시 태어나는 침수의 체험을 하는 것이다. 소멸과 재생, 그것이 바로 목욕을 통한 회복의 진정한 의미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나의 친구는 침수를 영원한 소멸로 종결지어버렸다.

한 학기동안 강의실에서 어떤 학생을 바라보면서 필자는 옛 친구가 환생한 것 같다는 묘한 느낌에 사로잡혔다. 그 친구가 죽은 것이 정확하게 1987년이었는데, 지금 신입생들도 대부분 1987년생들이다. 그 친구를 죽음으로 몰아버린 차가운 사람들 중에는 분명 필자도 끼어 있으리라는 20년 전의 자책이 다시금 물밀듯 밀려왔다. 그 때 공감이라도 해주었더라면…. 강의 중에 눈이 마주치면 친구를 닮은 그 학생은 웬일인지 빙긋이 웃었다. 옛 친구가 내게 이제 괜찮다고 웃어주는 것 같았다.

젊어서 겪지 않은 경험들은 나이 들어서라도 반드시 한 번은 거치게 된다고 한다. 질풍노도의 시기를 순풍에 지나간 듯 무사히 보낸 필자는 중년기에 접어들어 수많은 인생의 감기들을 아무 면역체도 생기지 않은 상태로 날 것으로 앓으며 살고 있다. 그림 들여다보는 일이 전공인지라 힘들 때마다 스스로 그림 하나씩을 처방하고 명상해보는 습관이 생겼다.
어설픈 나의 처방이 다른 사람의 영혼까지 치유할 수 있을지는 감히 확신할 수 없지만, 그림 감상과 더불어 마음을 함께 나눌 수 있는 따듯한 자리가 되었으면 좋겠다.

/leejooeun@yahoo.co.kr

■필자 이주은은 서울대학교 언어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덴버대학교에서 서양미술사 전공으로 석사 학위를, 이화여대에서 현대미술사 전공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이화여대 박물관 학예연구원으로 일하고 있으며, 저서 『빅토리아의 비밀:아름다운 그림 속 여인들이 숨겨둔 이야기』(2005)과 역서 『모던 유럽 아트:인상주의에서 추상미술까지』(2004)와 『1960년 이후의 현대미술』(공역·2007)이 있다.

■바네사 벨,'욕조',1917,테이트 갤러리,런던

Hot 포토

많이 본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