⑥ 조선시대 해상밀수 있다?없다?
2008.11.04 17:05
수정 : 2008.11.04 17:05기사원문
서울상인 박문호는 청나라 상인과 인삼밀무역으로 한참 재미를 보고 있었다. 이번에도 개성에 있는 인삼거래처에서 인삼을 사서 봇짐에 담았다. 막 출발하려는 순간 관가에서 온 사람들이 갑자기 덮치는 바람에 꼼짝없이 붙잡히고 말았다.
“나으리, 저는 죄가 없습니다. 단지 봇짐 안에 인삼을 담은 죄밖에 없습니다.”
“자네가 서울에서 잠상을 해 온 것을 다 아는 사실이거늘 거짓말을 할 생각인가?”
“아닙니다. 나으리.”
“잠삼(潛蔘·관의 허가 없이 몰래 만든 홍삼)을 가지고 어디로 갔었는가?”
“저희는 잠삼을 가지고 의주로 갔던 사람이옵니다.”
“나 보고 그 말을 믿으라 하는가? 가까운 바다 길을 두고 먼 육로로 갈 이유가 없는데도 말인가?”
위의 이야기는 고종 3년(1866년) ‘승정원일기’에 황해감사가 요즈음 말로 시장단속에서 검거된 피의자와 나눈 신문내용이다. 은근히 대화 속에서 해상을 통한 밀무역이 행해지고 있다는 것을 풍기고 있다.
의주는 지리적으로 압록강변 국경에 위치해 사신들이 드나드는 관문이었다. 정치적으로나 외교적으로 무척 중요한 곳이다 보니 국제무역이 증대되는 17세기 이후 의주지역에 근거지를 두고 있는 상인들이 크게 성장했다. 이 의주상인을 일명 만상(灣商)이라 부르는데 주로 육로를 통한 국경무역을 주도한 상인이다.
그러던 것이 18세기 초가 되면서 대청 밀무역 루트가 육로뿐만 아니라 수로로 확대된다는 점이다. 일본이 청국과 아메리카산 인삼을 직수입하는 바람에 그동안 활발히 진행되던 대일 인삼수출도 서서히 쇠퇴하고 다시 청나라로 인삼수출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19세기에 접어들어서는 ‘평양과 안주는 역로(歷路)의 요충이고 해주의 수로는 잠삼이 새는 구멍’이라 할 정도로 밀무역 루트가 변화를 보였다. 황해도 장산곶 앞 해상에서 청나라 상인이 타고 온 당선(唐船)과 접선을 해서 홍삼밀거래가 빈번하게 이뤄졌던 것이다. 최근 공·해상에서 이뤄지는 분선(分船·밀수선에서 다른 선박에 밀수품을 옮겨 싣는 행위)과 같은 해상밀수 형태가 전개된 셈이다.
이런 해상밀수에는 개성상인, 즉 송상(松商)이 개입돼 조직적인 홍삼밀무역으로 발전됐다. 이것은 육로로 통하는 길목인 송도, 만부(灣府)를 비롯해 황해·평안 감영(監營) 등에서 기찰(譏察)이 심하다 보니 밀상들이 육로보다 수로를 선호하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더욱이 1866년 초에는 중국에 머물고 있는 서양상인까지 이양선(異樣船)을 타고 밀무역에 끼어드는 형편이었다. 한탕주의식 해상밀무역이 이처럼 광범위하게 이뤄지다 보니 박제가가 ‘북학의’에서 서해안에 무역항을 개설, 청과 밀무역을 양성화하자고 주창했는지 모른다.
/이용득 부산세관 박물관장
■사진설명=18세기 말 아국총도(我國摠圖)상의 황해 평안도 부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