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죽은 자들로부터 오는 신호 ⑧
2008.11.27 16:53
수정 : 2008.11.27 16:53기사원문
■글: 박병로 ■그림: 문재일
자취하는 총각이 사는 집에서는 냉장고에서도 총각 냄새가 났다. 냉동실에 꽁꽁 언 돼지고기에서도 났고 오징어에서도 났다.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나중은 창대하리라.” 주방에서 프라이팬에 오징어와 돼지고기를 고추장으로 버무려 볶으면서 조향미는 조용히 혼자 읊조렸다. 총각 냄새와 꼬질꼬질 빈티 나는 이 정경이 성감을 간지럽혔다.
남편이었을까, 아니면 대학 때 헤어진 남자친구였을까. 차 안에서 이런 느낌으로 달아올랐던 적이 있었다. 지퍼를 내리고 그곳에 얼굴을 묻었을 때 이 총각 냄새에서 꽃게 찜에서 나는 키토산 향을 맡았었다. 입안에 가득 찬 그 냄새가 얼마나 쾌감을 주었던가. 연하남 로맨스가 이런 것이었구나 싶었다.
“오프라 님, 안 나오고 여기서 뭐하십니까.”
필립이었다. 두 팔을 벌리고 다가갔다. 그러고는 매달리듯이 목 뒤로 팔을 둘렀다.
“키스해 줄래요, 지금! 안 그러면 오늘밤 진짜 깨물어 줄 거예요.”
그녀는 필립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선하고 맑은 눈이었다. 새처럼 입술을 삐죽 내밀어 영철이 입술을 포개 왔다.
“영광입니다. 오프라 님. 가면 없이 키스할 수 있겠습니까?”
“네. 지금은요. 어쩌면 지금부터 큰 꿈을 꾸어야 할 것 같으니까요.”
그러나 키스는 짧게 끝났다. 안주를 찾는다며 김순정이 주방으로 들어왔기 때문이다. 그들은 오징어돼지고기 볶음과 사과와 칼, 땅콩 봉지를 하나씩 들고 거실로 나갔다. 6인용 회의 탁자가 금세 풍성한 술자리로 바뀌어 있었다.
조향미는 뿌듯했다. 이런 큰 꿈을 꾸는 사람들과 동행한다는 것이 무엇보다 기뻤다. 주식과 경매에 몰두했다가 3억 5천만 원을 날리고 필립의 카페에 유서를 써서 올렸던 것이 계기가 돼 여기까지 왔다. 그때 필립은 진심으로 걱정해 주었고 울적해질 만한 때가 되면 이메일을 보내 위로해 주었다. 지금 주식투자 전문가로부터 과외공부를 하는 것도 필립이 조언해 줬기 때문이다.
“자 여러분. 이 잔을 들고 여기서 결의를 합시다. 오늘 밤 사선을 넘어 여기까지 왔는데 무엇이 두렵겠어. 오바마 식으로 말하자면 우린 할 수 있어요!”
안주를 맛보고 술잔을 채운 뒤 노이만이 창백한 얼굴로 말했다.
“내는 빼주라. 암만 캐도 이 결이는 위계조직 아이가. 명색이 하나의 정부라고 자부하는 작가인 내가 누구 밑에 드가 알랑거리고 충성하는 거는 몬하겄다.”
사실 황인성과 배민서가 단짝 친구라는 것은 조직 차원에서 그리 달가운 일이 아니었다. 보스 영철을 두고 나이가 많은 두 친구가 의기투합하는 것은 조직 관리자로서 경계할 만한 일이었다. 둘이 조직을 흔들어댈 수도 있었고 도모할 수도 있었다. 그렇다고 친구 간에 충성 경쟁을 하는 것도 볼썽사나웠다.
조향미가 술잔을 들어 배민서의 잔에 부딪쳤다.
“맘대로 하세요. 돈에 한이 많은 저는 거절을 못하겠네요. 노 선생님이 관우가 되세요, 제가 장비가 될게요. 그리고 순정씨는….”
김순정이 혀가 꼬부라진 연변 말투로 말했다.
“언제 연변에 돌아갈지 몰라서 장담 못합네다. 하지만 뭐 끼워주신다면 가는 날까지 조자룡 정도는 할 수 있슴다.”
“거 아주 반가운 말씀이야. 그러면 빠질 놈은 빠지라 하고, 우선 네 사람이 의식을 거행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