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 고깔모자 아래 바보들 ③

      2009.03.12 17:55   수정 : 2009.03.12 17:55기사원문


■글: 박병로 ■그림: 문재일
“Q선생, 술을 좀 더 시키라요.”

“일부러 취하려 하지 마시오.”

“아님다. 우리도 부화방탕하게 한번 놀아 보자요.”

김순정은 그렇게라도 해서 필립에게 갈 수 있는 명분을 쌓고 싶었다. 연변 조선족으로 들어온 이상 공작원이 부부행세를 하는 것이 오히려 자연스러웠다. 연변 사람들 모임을 빙자해 이들과 만나는 것도 그래서 뜻이 있었다.

“이 USB에 녹취록이 있슴다.
KDS그룹이 성장하는 과정임다. 엉터리 같은 남한 사회가 어떻게 경제발전을 이뤄냈는지 보시라요. 우리 피, 필립 님이 세계적인 부자가 될 조건을 갖추고 있다는 것도 알 수 있을 것임다.”

혀가 꼬였다.

“보드카를 마시고도 끄떡하지 않던 순정씨가 맥주 두 병에 취했나요?”

B가 이죽거렸다.

“자본주의와 사랑에 취한 거겠죠. 우리 필립 님, 우리 필립 님! 말하는 거 봐요.”

“여기서 나가 포장마차로 갑시다. 취할 거면 소주를 마셔야지.”

당신들의 공화국에 대한 충성심이 올바르다면 필립을 붙잡으라고 부추겨야 한다. 김순정은 그런 생각을 하면서 카페에서 나왔다.

퇴계로의 보도를 점령하고 있는 포장마차로 들어간 네 사람은 어묵 국물에 소주를 놓고 앉았다. 공작원 B가 익숙한 솜씨로 닭똥집을 안주로 골랐다.

“맥주도 몇 병 주세요. 안 그랬다간 밤새 앉아 있을지도 모릅니다.”

김순정이 보기에 자신을 포함한 네 사람은 썩 훌륭한 스쿼드였다. 모두 충성스럽고 잘생겼다. 두뇌도 뛰어나고 사이보그나 로보캅처럼 정치의식적인 면에서도 강고했다. 좀 더 유연했으면 하는 바람이 있으나 그것은 욕심이었다. 어쩌면 그래서 필립과의 관계에 대해 추궁하거나 요구를 하지 않고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아이디어가 있고 충성스러운 공작원이라면 자본주의적인 퇴폐와 성적인 욕망을 자극하여 필립을 포섭하는 것보다 사랑으로 묶어 두는 것이 낫다고 볼 것이었다.

“오늘은 취하고 싶슴다.”

소주가 가득 찬 잔을 맥주를 반쯤 채운 잔에 퐁당 빠뜨리며 김순정이 쓸쓸하게 건배를 제안했다.

“녹취록을 잘 보시고, 나중에 토론해 보자요.”

안형모 회장의 경험은 자본주의 학습을 하는 공작원들에게 훌륭한 교재였다. 옛 공작원들과는 달리 서울에서 자본주의를 학습한 그들은 북에 복귀해서 경제관료로 활동하거나 사업체를 꾸리는 일꾼이 될 터였다. 녹취록은 그럴 때 참고할 만한 자료였다. 경공업에서 중화학공업으로 그리고 서비스산업으로 KDS그룹의 주력사업이 바뀌는 과정은 특히 모범적인 선례와 근절되어야 할 사회악의 양면이 잘 나타나고 있었다.

“바보들이 사는 남조선을 투기로 망하게 해서 모두 자살하게 하든지 부정과 비리로 저희들끼리 내분이 일어나 망하게 하든지 할 수 있을 것임다.”

쉿. Q가 입에 검지를 대며 눈을 치떴다.

“시선을 끄는 말은 삼가시오!”

“연예인이나 스포츠 스타 사생활 얘기가 아니면 쟤들은 아무 관심도 없슴다.”

취기가 올라왔다. 경적필패라 했다. 그러니 어쩌면 그녀는 지금 심각한 이적행위를 하고 있는 셈이었다.
적을 업신여기는 것은 틀림없이 조직에 잘 보이고 싶다는 신호였다. 하지만 그것은 주인 곁의 개가 왈왈 짖어대는 듯이 비굴한 일이었다.
그런데도 김순정은 뭔가 좀 더 화끈하고 충격적인 충성신호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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