⑨ 거장들의 오마주로 ‘주목’ 서양화가 남경민

      2010.03.18 17:28   수정 : 2010.03.18 17:28기사원문

▲ 대가들의 오마주를 극대화한 '화가의 서재―마네에서 워홀' 앞에 선 남경민 작가. 이 작품은 가로 200㎝, 세로750㎝ 크기의 작품 5개를 엮은 대작으로 거장들의 상징적인 오브제들과 병치해 고전에 대한 경외감을 담았다.

가벼워 보였다. 3년 만의 칩거를 끝내고 나온 서양화가 남경민(43)은 그의 작품 속 나비처럼 팔랑거렸다. 길게 늘어뜨린 파마머리는 그림에서 방금 나온 나비 떼가 유영하듯 하늘거렸다. 지난 17일 꽃 피는 3월인데도 오후에 눈이 온다는 이상한 날씨 속에 만난 작가는 오랜 숙제를 끝낸 듯 기분 좋아 보였다.

작가는 '나비' '화가의 방' '화가의 아뜰리에' 시리즈를 선보이며 주목받았다. 피카소, 렘브란트, 세잔 등 명화의 거장들을 오마주하며 그들의 존재를 좇는다. 거장의 침실, 거실, 아틀리에 등 모든 작품엔 나비 떼가 폴폴 날아다닌다. '화가의 방·아뜰리에' 시리즈는 아도르노가 표현한 '미메시스'다. 모방을 넘어서 숭배의 의미를 담아 자신의 오마주를 곳곳에 삽입한 작품들은 보는 이에게 그림을 '조직적으로 밀착'시킨다.

미술시장이 뜨겁던 2006년 말 서울 송현동 이화익갤러리서 연 남경민 개인전은 그야말로 대박이었다. 극사실 하이퍼리얼리즘 미술품이 득세하던 당시 그의 작품은 몽환적이고 초현실적인 분위기로 컬렉터들을 사로잡았다. 건조한 느낌이 가득한 실내풍경, 거장들의 비밀스러운 공간을 작가의 시선으로 재구성한 신비로운 상상의 공간이었다. 전시작품은 매진됐다. 미술시장에서 남경민의 이름을 새기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이후 오랫동안 남경민은 떠오르지 않았다.

―그땐 왜 사라졌나, 그동안 어떻게 지냈나.

▲전시를 끝내고 정말로 주문이 이어졌다. 팔린 작품이 갖고 싶다며 똑같이 다시 그려 달라는 사람도 있었다. 작업실로 돈다발을 들고 오기도 했다. 하지만 모두 거절했다. 주문 그림을 하다 보면 내 맘대로 그리지 못하겠다는 판단에서였다. 미술시장이 완전히 활황이 되기 전에 전시를 했고 그때 작품 팔린 게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광풍이 불어 투자품으로 산 컬렉터보다 정말 내 그림이 좋아서 산 고객이 많다고 들었다. 지금도 그림을 애지중지한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너무 좋다. 욕심이 있었다. 에너지를 모아 크게 전시하고 싶었다. 고객과 관객에게 실망을 주지 않는 작품을 하고 싶었다.

―'나비 작가'라고 할 만큼 그림엔 흰 불꽃처럼 나비가 많다.

▲나에게 나비는 영혼이다. 나비는 현실과 상상을 이어주는 매개체다. 어느 날 아파트에 나비 떼가 들어온 것이 계기가 됐다. 나비는 보기엔 가냘픈데 강인하다. 제왕나비 수천 마리가 떼 지어 캐나다에서 멕시코로 날아가 겨울잠을 잔다고 한다. 모시나비 계통 나비들은 빙하시대의 추운 기후를 극복하고 살아남은 생명력이 강한 종으로 알려져 있다. 연약하지만 강인한 작가의 삶과 닮은 것 같다. 2000년에 그리기 시작할 때 한지로 나비 모빌을 수백개 만들었다. 천장에 설치하고 낚싯줄에 매달아 나비를 몇 개월 동안 그렸다. 나비 그림자까지도 그렸다. 안 보고도 그릴 수 있을 정도가 됐다. 나비는 예술가의 미적인 자의식을 보여준다.

―해골, 백합, 유리병, 날개 등 암호 같은 그림이 많다. 무슨 의미인가.

▲ 남경민의 2008년작 ‘피카소’.

▲해골이 무섭다는 사람도 있지만 난 해골이 이쁘다. 작품 속 해골은 죽음의 상징이라기보다 오히려 삶을 신성시하게 되고 내면을 돌아보게 한다. 언젠가는 가는구나 하는 겸허한 생각이 들어 실존적인 화두로 해골을 담았다. 시간이 흘러도 변치 않는 진리의 투명한 본질을 나타내는 투명한 병, 순간과 영원성을 보여주는 촛대와 시간의 흐름과 정지를 나타내는 모래시계도 있다. 최근 작업엔 백합이 많아졌다. 백합은 회화의 순수와 진정성을 보여주는 역할을 한다. 날개는 예술가의 이상을 상징한다. 이런 상징적인 오브제들이 지속적으로 등장하는 실내풍경 시리즈는 내 작품의 모태다.

―부재의 풍경, 인물은 없고 공간만 있다.

▲공간만 찍는 칸디다 회퍼라는 사진작가를 좋아한다. 그가 왜 공간만 찍느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공간 속에 인물이 들어가면 인물의 생김새에 치중한다. 내면을 읽기 힘들다." 이 말에 공감한다. 인물은 아직까지 그려보고 싶은 생각이 없다. 실내풍경 시리즈는 고요한 힘이 주는 느낌을 통해 화가의 내면적인 정서로 표현해 보려 했다. 창밖의 풍경으로 나무나 숲이 자주 등장하는데 특히 숲의 풍경은 상상하기, 사유하기에 적절한 모습을 갖고 있어 좋아한다.

―어떻게, 왜 공간에 집중하게 됐나.

▲대학원 때였다. 모퉁이 실기실엔 2m가 넘는 창이 있었다. 시야가 길고 넓었다. 당시 나는 비구상 작업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날 밤 창문을 통해 환영 같은 게 느껴졌다. 빛과 어둠으로 떨어지는 묘한 풍경. 현실을 기반으로 하고 있지만 몽환적이고 환상적인 느낌을 받았다. 이때부터 공간에 집중하게 됐고 작품의 배경이 됐다. 그림은 타임머신이다. 공간을 그려넣고 그림 속에 들어가 마치 그들이 있는 것처럼 대화를 나눈다. 의자에도 앉아보고, 책도 만져보기도 한다. 거장들의 작업실을 재구성한 것은 거장들의 창조적 공간에 대한 관심과 동경에서 출발했다. 화가들이 머물렀던 아틀리에, 빈 침대, 빈 의자 등은 알리바이를 제공하는 단서다. 명화 삽입은 친근감 있게 다가오게 하기 위한 소재다.

―작품엔 많은 거장이 등장한다. 그중에 누구를 닮고 싶나.

▲바로크 시대 화가다. 벨라스케스, 렘브란트, 페르메이르를 좋아한다. 하지만 피카소의 열정을 사랑한다. 끊임없는 열정과 활력으로 죽을 때까지 붓을 놓지 않았다는 게 부럽다.

작가는 3년 전 갤러리현대와 전시 결정을 한 후 유럽여행을 떠났다. 고흐, 렘브란트, 세잔의 작업실을 찾아 다니며 자료를 수집하고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모든 것을 걸었다. 청계산 앞에 있는 작업실에 파묻혀 미친 듯이 그림만 그렸다. 문 앞엔 등산로가 있었지만 산에 갈 생각도 못했다. 하루 종일 그림만 그리다 보니 오른팔 근육에 이상이 왔다. 잘 쓰지 않는 왼팔도 아팠다. 전시일정은 다가왔지만 또 미뤘다. 조금만 더, 조금 더, 욕심을 내며 6개월째 연기했다. 3월 초 갤러리 측은 "이젠 됐다"며 그를 말렸다.

남경민의 여덟 번째 개인전 '풍경을 거닐다'가 서울 신사동 갤러리현대강남에서 18일부터 4월 4일까지 열리고 있다. 작가 내면의 심리세계가 더욱 돋보이는 신작 30여점을 선보인다. 색감의 깊이가 풍부해지고 100호 대작이 대부분인 작품들에는 시간과 대결한 작가의 열정이 고스란히 담겼다.

"그림은 내 삶의 모든 것이다.

성실하고 좋은 작가로 남고 싶다. 작가로 늙어가고 싶다.
이번 전시가 작가로서 한 단계 도약할 시점이라고 본다."

/hyun@fnnews.com 미술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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