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림걸즈’ 작곡가 헨리 크리거의 숨겨진 걸작 ‘사이드쇼’
2010.05.05 12:18
수정 : 2010.05.05 12:11기사원문
일본에서 뮤지컬 공연 기간은 약 3∼4주가 기본이다. 물론 예외도 있어서 한국에 잘 알려진 시키는 오픈런을 기본으로 하고 있고, 반대로 창작뮤지컬은 공연 기간이 열흘이 채 안된다. 하지만 토호와 호리프로를 필두로 라이선스 뮤지컬을 주로 공연하는 제작사들 대부분은 한달 단위로 레퍼토리를 바꾸고 있다.
시키 극장 4곳을 포함해 뮤지컬 전용극장만 10곳이 넘는 도쿄에서 공연이 한달 단위로 바뀌기 때문에 관객이 선택할 수 있는 레퍼토리는 상당히 다양하다. 특히 아주 오래전에 뉴욕과 런던에서 무대에 올랐던 작품이나 최근작이지만 롱런하지 못한채 끝난 작품조차도 일본에선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이런 작품들의 경우 대본과 음악 라이선스만 저렴하게 구입할 수 있기 때문에 제작사에게 그다지 부담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에 스타를 캐스팅하고 연출에 조금만 신경쓰면 수익을 남길 수 있는 것도 일본 뮤지컬 프로듀서들의 이런 작품을 선호하는 이유다.
최근 도쿄예술극장에서 막을 내린 뮤지컬 ‘사이드쇼(Sideshow)' 역시 1997년 뉴욕 브로드웨이에서 초연된 이후 오랫동안 만날 수 없었던 작품이다. 미국의 대학 극단이나 지방에서 몇 차례 공연된 적은 있지만 대부분 최근의 일이다. 2006년 가수 비욘세가 출연한 영화 ’드림걸즈'가 인기를 끌면서 원작인 뮤지컬의 작곡가 헨리 크리거(65)의 재조명과 함께 그의 또다른 뮤지컬 ‘사이드쇼’ 역시 부활한 것이다.
이번에 일본에서 공연된 ‘사이드쇼’ 역시 ‘드림걸즈’의 영향이 크다. 즉 5월19일∼6월5일 도쿄 분카무라에서 공연되는 뮤지컬 ‘드림걸즈’를 앞두고 발빠르게 기획된 것이다. 한국의 오디뮤지컬컴퍼니가 제작에 참여한 것으로도 잘 알려진 ‘드림걸즈’는 지난해 2월 서울을 시작으로 미국 순회 공연을 가진 뒤 도쿄에서 선보이게 됐는데, 올해 일본을 찾는 첫 오리지널 뮤지컬이어서인지 상당한 관심을 모으고 있다.
‘드림걸즈’ 덕택에 다시 대중 앞에 나오긴 했지만 ‘사이드쇼’는 그 자체만으로도 매우 흥미로운 작품이다. 20세기 초 실존했던 샴 쌍둥이 바이올렛&데이지 힐튼(1908∼1969) 자매를 모델로 현실과 이상의 차이, 꿈과 사랑의 양면성 등을 그리고 있다. 비록 1998년 토니상 시상식에서 ‘라이온킹’ ‘컨택트’ ‘캬바레’ ‘래그타임’ 등 쟁쟁한 강자들과 경쟁하는 바람에 상을 하나도 건지지 못했지만 오랫동안 묻혀 있었던 것이 아까울 만큼 재밌다.
작품의 배경은 1930년대 미국. 샴 쌍둥이의 숙명을 타고난 바이올렛과 데이지는 서커스단에서 살고 있다. 이 서커스단은 수염난 여자, 도마뱀 남자, 파충류 남자 등 기형인간들만 모여있는 곳이다. 작품 제목인 사이드쇼는 기이한 것을 보여주는 서커스를 뜻한다.
우연히 이 서커스단의 쇼를 본 작곡가 바디와 프로듀서 테리는 미모에 노래와 춤까지 뛰어난 샴 쌍둥이 자매에게 스카웃을 제의한다. 스타가 되는 것을 동경해오던 데이지는 기뻐하지만 행복한 가정을 갖는 것이 꿈인 바이올렛은 주저한다. 하지만 바이올렛 역시 바디를 좋아하게 되면서 쇼비지니스 세계로 뛰어든다.
샴 쌍둥이 자매는 바디와 테리의 예상대로 얼마안가 큰 인기를 끌게 된다. 그리고 바디는 자신을 좋아하는 바이올렛을 위해 청혼까지 한다. 한편 테리 역시 데이지에게 끌리지만 이성적인 그는 자신의 마음을 닫는다.
마침내 언론의 관심이 집중된 결혼식 당일. 바디는 샴 쌍둥이인 바이올렛과 평생 함께 할 생각에 두려워져 결혼을 포기하고 만다. 이때 서커스 시절부터 바이올렛을 사랑해 따라온 흑인 보디가드 제이크가 바이올렛에게 청혼하지만 피부빛이 다르다는 이유로 거절당한 뒤 떠나버린다. 그리고 데이지가 용기를 내 테리에게 청혼하지만 샴 쌍둥이라는 이유로 거절당하면서 결혼식은 난장판이 된다.
이때 유명한 영화감독이 결혼식에 찾아와 자매를 영화에 캐스팅한다. 이 제안에 기뻐하며 계약을 맺으려는 테리와 바디에게 자매는 차갑게 결별을 고한다. 하지만 영화 제목이 ‘괴물들’이란 얘기에 자매는 자신들의 서글픈 현실을 직시한다.
실존했던 샴 쌍둥이 힐튼 자매는 생전에 상당한 인기를 누렸다고 한다. 자서전을 내기도 하고 2편의 영화에 출연하기도 했다. 이 가운데 극중에 나오는 ‘괴물들(freaks)’은 호러 영화계의 전설로 불리는 토드 브라우닝 감독이 1932년 만든 영화로 힐튼 자매를 비롯해 기형인간들이 모인 서커스를 배경으로 한다.
뮤지컬은 2008년 ‘드림걸즈’의 연출 및 안무를 맡은 로버트 롱버텀이 우연히 힐튼 자매가 출연한 영화 ‘체인드 오브 라이프’를 본데서 시작됐다. 이 영화는 샴 쌍둥이 가운데 1명이 살인을 저지른 뒤 법정에 2명이 서게 되는 이야기다. 영화 속 샴 쌍둥이에 매료된 롱버텀은 작가 빌 러셀에게 대본을 부탁하고, 다시 러셀이 작곡가 헨리 크리거에게 작곡을 의뢰하면서 뮤지컬 ‘사이드쇼’가 나온 것이다. 초연 당시 관객 동원에는 실패했지만 비평에 인색한 뉴욕타임스가 ‘고전적인 브로드웨이풍과 날카로운 현대적 감각이 섞인 매혹적인 작품’이라고 칭찬할 만큼 묘한 매력이 있다.
이번 일본 버전은 연극과 뮤지컬을 오가며 활발하게 활동하는 이타가키 교이치가 연출을 맡았는데, 단순한 무대세트를 효과적으로 활용해 인상적이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이 작품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힐튼 자매 역의 다카시로 게이와 사키호 주리다.
다카라즈카 출신으로 최근 일본 뮤지컬계에서 두드러진 활동을 보이는 두 배우는 노래와 연기에서 우열을 가릴 수 없는 열연을 펼쳤다. 사실 ‘사이드쇼’는 어느 한 쪽이 두드러지게 잘하거나 반대로 못하면 작품의 매력이 반감되는데, 두 배우 모두 균형감각을 잃지 않으면서도 각각의 역할에 충실해 관객을 감동시켰다. 다만 여배우들의 상대역인 남자 배우들의 경우 사랑과 현실 사이에서 고민하는 모습 등이 그다지 절실하게 와닿지 않아 아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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