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석준 고양문화재단 대표

      2010.07.07 17:10   수정 : 2010.07.07 17:10기사원문
고교 2학년 때 서울 명동극장에서 본 연극 한 편이 그의 청춘을 바꿔놓았다. 1970년대 초 히트를 쳤던 이낙훈·전양자 주연의 ‘오델로’가 그 연극. 입시를 한창 준비해야 할 시기에 틈만 나면 거울 앞에 서서 연기를 했다. 연극영화과를 졸업한 뒤 곧바로 달려간 곳도 서울 명동의 삼일로창고극장. 당장 주어진 일은 무대 정리며 분장실 청소였다. 그러길 1년. 배역을 따내긴 했지만 역할은 대사도 없는 귀신이었다. 그후 2∼3편의 작품 출연이 더 있었다.
하지만 무대를 내려올 때마다 고개를 떨어뜨렸다. 자신의 길이 아니라는 걸 절감했기 때문이다.

방향을 틀어 선택한 게 연출이다. 데뷔작은 이탈리아 작가 잔클로드반의 ‘뱀’. 당시 한 유명 평론가는 그를 ‘연출계 샛별’이라고 치켜세웠지만, 무대서 불이 꺼지면 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배우나 연출은 타고난 천재성이 없이는 한계가 있다는 걸 깨달은 거죠. 전 전형적인 노력형이거든요. 뭐든 열심히만 하면 다될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던 겁니다.”

재빨리 다시 붙잡은 건 공연 기획이다. 포스트를 만들고, 전단지를 붙이고, 마케팅 전략을 짜고…. ‘진로’를 바꾸자마자 아이디어가 쉴 새 없이 쏟아져 나왔다. 당시 연극 주관객이 여대생이라는 점에 착안, 여고 졸업 앨범을 구해 앨범에 나온 주소대로 초대권을 뿌린 건 유명한 일화다. “초대권을 한 장만 넣는 거죠. 그 여학생은 누군가와 같이 극장을 올 것이고. 그러면 결국 50% 할인 마케팅이 되는 거예요. 극장에 와서는 팸플릿도 구입하니 극장쪽에선 남는 장사였어요.” 그가 고안해낸 이런 유의 ‘신종 마케팅’은 다른 극장의 벤치마킹 대상이 됐다. 그렇게 시작한 공연 기획일이 이제는 30년이 넘는다.

고양시의 문화아이콘 ‘아람누리 어울림누리극장’을 운영하는 고양문화재단 조석준 대표(57) 이야기다. 그는 스스로를 ‘노력형’이라고 하지만 주변 사람들은 그를 ‘워커홀릭’의 전형이라 말한다. 한 번 일에 빠지면 끝까지 매달리는 집요한 스타일.

‘기획통’ 조 대표는 공연장 개관 전문가다. 예술의전당 콘서트홀과 오페라하우스, 대전문화예술의전당이 그의 손을 거쳐 문을 연 대표적인 공연장이다. 예술의전당에서 그는 30대, 40대를 보냈다. 이 무렵 일년 365일 중 362일을 출근했을 정도로 일에서 손을 놓지 못했다. 공연장 백스테이지 일체를 관리하는 ‘하우스 매니저’를 도입한 이도 조 대표다. 2003년 대전문화예술의전당 관장을 거쳐 지난 2008년 3월 이곳 고양문화재단으로 옮겨온 조 대표는 지난 1월 3년 임기로 연임됐다.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던 지난 2일 오전 고양시 화정동 어울림누리극장 집무실에서 조 대표를 만났다. 노타이에 날이 선 새하얀 와이셔츠 차림의 조 대표는 단단한 느낌을 줬다.

고양문화재단은 지자체 지원 140억원과 자체수익금 120억원을 합쳐 한해 예산 260억원을 쓰는 대형 문화기관이다. 공연장이 지역에 기반을 두고 있지만 서울 관객에게도 낯설지 않은 이유는 전략적으로 키운 아람누리 때문. 아람극장, 아람음악당, 새라새극장 3곳이 모여있는 아람누리는 개관한 지 이제 갓 3년이지만 화려한 출연진을 자랑한다. 올해만 해도 세계적인 테너 호세쿠라가 내한 첫 무대로 아람누리에 섰고, 세계를 울리는 디바 홍혜경도 2년 반 만에 가지는 고국 리사이틀 공연 첫 무대(8일)를 아람누리에서 한다.

하반기엔 러시아 볼쇼이 발레단과 쌍벽을 이루는 상트페테르부르크 마린스키 극장 키로프 발레단 공연 일정(11월)이 잡혀 있다. “한·러 수교 20주년 기념 초청 공연이에요. 그 즈음 러시아 주간 행사를 선보일 겁니다. 내년엔 한·호주 수교 50주년이에요. 호주의 대표적인 공연단체를 초청해 무대를 가질 예정이고요.”

조 대표는 아람누리로 지역 공연장의 한계를 깨면서 동시에 공익성을 추구한다. “아람누리와 어울림누리는 100만 고양시민을 위해 만들어진 곳이에요. 이들의 문화향수를 채워주고 지역 예술가들의 무대 기회를 보장해주는 일도 중요합니다. 대신 3류극장이 아닌, 1류극장의 무대를 갖춰 고양시민들에게 공간을 만들어줘야겠다는 게 제 소신이었어요.”

내년 1월부턴 고양시내 37개 마을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오전 11시 마티네콘서트’를 벌일 계획이다. 1년에 12번 콘서트를 3년 정도 하면 37개 마을을 한 번씩은 다 돌게 된다는 게 조 대표의 계산. 이 마티네콘서트는 찾아가는 음악회와는 다르다고 그는 재차 강조했다. “찾아가는 게 아니라 주민들이 직접 공연장을 찾아오게 만들려는 거죠. 지역 주민을 위한 맞춤공연입니다. 원하는 곡을 미리 받아 무대에 올릴 거예요. 주민들의 눈높이를 맞추고 가까이 다가서는 공연장이 될 겁니다.”

아마추어 지역 예술인들을 위해 4계절 페스티벌을 정착시켜 이들에게 다양한 무대 기회도 제공할 예정이다. 4000명에 육박하는 고양예술인들에겐 그들만의 무대가 절실하다는 것.

조 대표는 지역 문예기관과 손잡고 공동으로 공연을 올리는 방식의 제작 트렌드도 만들어내고 있다. 제작비 부담은 줄이면서 독자 레퍼토리를 확보할 수 있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다. 지난해 연극 ‘오델로’를 고양과 대전에서 무대에 올려 유료관객점유율 70%를 기록, 반응도 기대 이상이었다.
올해는 10월 말 공연 예정인 오페라 ‘라보엠’을 대전문화예술의전당과 공동으로 제작한다. 지난해 첫선을 보인 자체 제작 공연 가족 오페라 ‘마술피리’를 다음달 다시 무대에 올린다.


“자체 제작능력이 있어야 살아있는 공연장”이라는 조 대표. 그의 집무실은 전체 사무실 중 가장 늦게 불이 꺼지는 방이다.

/jins@fnnews.com최진숙기자

■조석준 고양문화재단 대표 약력 △서울 △중앙대 서라벌예술대학 연극영화과 졸업(74년) △삼일로창고극장 연출·기획(77∼81년) △숭의음악당 공연기획(82∼87년) △예술의전당 공연부 과장(88∼91년) △예술의전당 사업개발부·오페라하우스 개관전담반·공연1부 차장(91∼95년) △예술의전당 무대기술부·대외협력부 부장(95∼98년) △예술의전당 무대기술팀·교육사업팀 팀장(98∼2002년) △대전문화예술의전당 관장(2003∼2007년) △고양문화재단 대표(200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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