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도는..,더는 울지 않는다

      2010.11.04 18:48   수정 : 2010.11.04 18:47기사원문

▲ 섬 여행에서 만난 한 해설사가 그랬다. 붉은색 등대는 들어오는 배들에게 빨리 들어와서 편히 쉬라고 빨간색이고 흰색 등대는 나가려는 배에 여유 있게 준비하고 천천히 나가라는 뜻에서 흰색이라고. 믿거나 말거나 꽤나 낭만적인 해석이다. 유람선을 타고 홍도를 돌아보는 중에 만난 흰색 등대는 이렇게 말했다. 여유 있게 감상하고 다음에 또 오라고.

【신안(전남)=김수영기자】사람들은 왜 서쪽 끝자락에 있는 그 섬을 '붉다'했을까. 신비 혹은 환상의 섬으로 기억돼온 그 섬을 오늘에서야 마주하게 된다는 설렘에 서울에서 전남 목포로 향하는 버스 안에서 쉽게 잠이 들 수 없었다. 4시간 만에 도착한 목포항. 붉게 충혈된 눈으로 지도를 보니 '그 섬'까지 남은 거리는 115㎞. 쾌속선을 타고 또다시 2시간30분이다.
비금도까지의 1시간은 비교적 잔잔했다. 멀미약을 괜히 먹었다 싶을 때쯤 이전의 고요했던 바다는 간데 없고 갑자기 화를 내기 시작한 파도는 승선객을 사정 없이 유린했다. 흑산도를 지나 마지막 종착지인 '그 섬'만을 남겨놓자 배의 출렁임은 극에 달했고 여기저기 비닐봉투와 씨름하고 있는 사람들이 눈에 띄었다. 첫 인상 치고는 제법 고약한 인사구나 싶었다. '그 섬'은 그렇게 쉽사리 제 속살을 허용하지 않았다.

■신비의 섬 홍도

바다를 아득하게 달려 왔다. 저 멀리 '그 섬'이 보인다. 바다 위에 연꽃같이 앉은 섬. 섬 전체가 홍갈색을 띤 규암질의 바위로 이루어졌고 풍란을 비롯한 540여종의 희귀식물과 231종의 동물 및 곤충이 서식하는 섬. 섬 전역이 천연기념물 제170호, 다도해해상국립공원으로 지정돼 풀 한 포기 돌멩이 하나 가져갈 수 없는 섬. 신안군이 자랑하는 '천사의 섬'(이곳엔 섬이 총 1004개)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풍광을 자랑하며 해질녘이면 섬 전체가 붉게 보인다는 바로 그 섬. 홍도다.

선착장에 발을 내딛자 습한 바람결에 갯냄새가 물씬하다. 좁은 산비탈을 따라 조개껍데기처럼 촘촘히 박혀 있는 숙박업소들. 오와 열을 무시한 채 울긋불긋 색을 자랑하는 건물들은 멀리서 온 손님들을 환영하는 흡사 카드섹션과도 같았다.

홍도는 1구와 2구로 나뉘어 있는데 관광객들이 흔히 머무는 곳인 1구에서는 깃대봉(365m)을 오르는 전망대길이 빼놓을 수 없는 관광코스다. 여독이 풀리지 않아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고 있는데 일순 뿌옇던 시야가 맑아지며 홍도가 한눈에 들어왔다. 에메랄드빛 바다 위로 흩뿌려진 33개의 꽃잎들. 그 자태에 취해 넋을 잃고 있는 동안 멀리서부터 바닷속으로 잠겨 들어가는 '홍도의 낙조'를 만났다. 서서히 붉은 옷으로 갈아입는 홍도의 자태는 신비로움을 넘어 무섭기까지 했다. 홍도에는 가로등이 없다. 석양이 내려앉은 자리 위로 쏟아질 듯 뭇별만이 어둠을 채운다. 낮엔 명멸하는 물비늘로 반짝이고 밤엔 무수한 별들로 찬란한 홍도의 밤. 홍도의 밤은 때론 낮보다 아름답다.

다음 날 아침 홍도 유람선에 올랐다. 유람선은 오전 7시30분, 낮 12시30분 하루에 두 번뿐이다. 가장 먼저 만난 것은 남문바위. 홍도 제1경으로 바위섬에 구멍이 뚫려 있다. 소형 선박이 지나갈 수 있을 정도의 크기로 이 석문을 지나간 사람은 1년 내내 더위를 먹지 않고 행운을 얻게 되며 고깃배가 그 아래를 지나면 많은 고기를 잡을 수 있다는 전설이 있다. 이외에도 실금리굴, 만물상, 독립문바위, 거북바위 등 저마다의 사연을 간직한 기기묘묘한 해암들이 즐비하다. 파도가 빚어낸 해식동굴 안에선 소나무가 거꾸로 자라고 절벽 끝자락 아슬하게 붙어 있는 '아차바위'는 금방이라도 바다 위로 뛰어오를 듯 기세가 약동한다. 바위 틈 사이로 정성스럽게 조물주가 분재해 놓은 해송들과 고요한 바다에 앉아 자맥질에 여념이 없는 가마우지. 눈길 닿는 곳마다 선경이다.

유람선 관광에서 빼놓을 수 없는 또 한 가지는 선상에서 맛보는 회. 기암괴석들을 올려다보느라 목이 뻣뻣할 때쯤 고깃배 한 척이 옆에 와 붙는다. 우럭, 광어 등 한 팩에 3만원. 만만한 가격은 아니지만 홍도의 절경을 감상하며 먹는 회는 그 맛도 일품이며 추억거리로도 단연 최고다. 그리고 이 곳 몽돌해수욕장에 깔려 있는 크고 작은 돌에는 규암 성분이 많아 신경통, 피부병, 무좀 등에 효과가 있다고 한다. 특산물로는 전복, 세발낙지, 돌미역, 돌김 등이 있다. 홍도는 오는 16∼18일 '한마음 큰잔치'를 벌인다. 섬마을음악회 미니콘서트 사진전시회, 물회 시식회 등을 펼쳐놓고 관광객들을 기다린다.

▲ 흑산도 칠형제 바위 전경

■어머니의 품 같은 흑산도

홍도에서 배를 타고 40분. 전날의 호된 신고식에 잔뜩 긴장한 탓인지 대부분의 사람들이 승선하자마자 자리에 몸을 파묻은 채 잠을 청했다. 파도의 일렁임이 잔잔해질 무렵 흑산도가 눈에 들어왔다. 바닷물이 푸르다 못해 검게 보인다 해 흑산도다. 해안선 길이가 41.8㎞에 달하는 제법 큰 섬이다. 이곳 관광의 주는 24.5㎞의 일주도로를 버스를 타고 도는 것. 길은 지극히 조용하고 정갈하다. 홍도가 조각품을 전시해 놓은 미술관이라면, 흑산도는 잘 다듬어 놓은 정원과도 같다. 구불구불 해안도로를 따라 바다와 숨바꼭질을 하다보면 돌하루방, 지도바위, 칠형제바위 등을 만난다. 작은 바위섬 하나에도 이름을 붙이고 전설을 만들어 온 섬마을 사람들. 자연을 대하는 그들의 태도에선 경외감마저 든다.

버스에 동승한 해설사가 "여러분이 오신다기에 아침 일찍 나와 예쁘게 닦아 놓았다"며 너스레를 떤다. 창밖을 내다보니 상라전망대로 오르는 길에 펼쳐진 동백나무가 햇살을 받아 영롱하다. S자형 고갯길을 감돌아 올라온 전망대엔 '흑산도아가씨 노래비'가 세워져 있었다. 동쪽으로는 대장도와 소장도가 보이고 그 사이로 해무에 가려진 홍도가 신기루처럼 떠 있다. '아 여기서 너를 또 보는구나.' 고개를 돌려 서쪽으로는 푸른 바다 위로 넓게 펼쳐진 예리항과 점점이 박힌 고깃배가 한데 어울려 또 하나의 비경을 빚어낸다. 어느새부턴가 들려오는 이미자의 '흑산도 아가씨'가 정물(靜物)의 풍경 위에 옅은 호흡을 불어 넣는다.

아쉬움을 뒤로한 채 또다시 이어지는 해안도로. 드문드문 모여 있는 마을을 따라 양식장이 보인다. 이곳 흑산도의 양식장은 다른 지역의 그것과는 다르다. 차가운 수온으로 적조가 없고 조류가 빨라 물고기 운동량이 많다. 그렇다보니 자연산처럼 살이 실하고 쫄깃하다. 또 이곳은 홍어로 유명한데 모양은 정확한 마름모꼴이며 수컷보다는 암컷이 훨씬 크고 맛도 좋다. 때문에 내륙지방 수산시장에서 종종 수컷의 생식기를 떼어내고 파는 경우도 있다고 하니 흔적(?)을 잘 살펴볼 일이다. 수입산은 검은 빛이 감돌며 각이 없이 둥근 모양을 하고 있어 참고로 알아둘 만하다.

일주관광의 출발이자 종착지인 흑산도항 옆에는 자산문화관이 있다. 정약전 선생이 16년간 유배생활을 하는 동안 227종의 해양생물을 기록해 놓은 '자산어보'가 전시돼 있다. 내부에는 다양한 영상과 모형으로 흑산도의 모든 것을 소개하고 있다.

▲ 하누넘(하트)해수욕장

■천일염전의 시작 비금도

배를 타고 다시 육지 쪽으로 1시간 더 가면 비금도가 나온다. 천일염전이 가장 먼저 시작된 곳으로 유명하다. 섬의 모양이 '새가 날아오르는 형상'이라 비금도(飛禽道)라기도 하고 수입산과 화학소금이 식탁을 점령하기 전 호황을 누릴 당시 '돈이 날아 다닌다'고 해서 비금도(飛金道)라고 부르기도 한다. 푸른 하늘이 고스란히 투영된 염전 위에 부지런한 염부가 장화를 신고나와 소금밭을 닦는다. 일손은 부족한데 광업으로 분류돼 외국인 노동자를 쓸 수도 없다. 생산량이 충분하지 않아 고민이 이만저만이 아니라 한다. 너무 흔해 가치를 잊고 있던 소금. 우리가 모르는 새 아름다운 전통이 그 명맥을 잇지 못한 채 천천히 사그라져간다.

다시 길을 재촉한다. 이곳 또 하나의 자랑거리는 해수욕장이다. 끝간 데 없이 길게 펼쳐진 모래사장. 곱디 고운 모래는 단단하기도 해 발자국이 잘 남지 않는다. 바다를 향해 우뚝 솟아있 는 3개의 풍력발전기는 섬 여행에서 처음 만난 인공 조형물이다. 하누넘해수욕장도 특이하다. 하트 모양을 하고 있다기에 '설마'했는데 진짜 하트다. 드라마나 영화의 단골 촬영장소이자 연인들의 필수코스로도 유명하다. 구불구불 산길을 지나 마을로 내려오니 정겨운 돌담길이 보인다. 둥근 돌 대신 납작한 돌과 각형의 막돌로 쌓은 이곳 내촌마을 돌담길에서 '셔터' 한방 날려주는 센스가 필요하겠다. 또 이곳이 낳은 천재 바둑기사 이세돌 기념관도 가볼 만 하다.

신안군이 자랑하는 천사(1004)의 섬. 어느 곳 하나 모자라다 할 수 없는 비경과 장구한 이야기를 품고 있는 보석 같은 섬. 그곳에선 시간이 멈추고 갈라진 틈 사이로 잠자고 있던 낭만들이 화닥닥 깨어나 달라붙는다. 선착장을 벗어나는 쾌속선 뒤로 바다 위에 앉아 있던 갈매기들이 울음소리를 내며 따라온다.

"홍도야, 흑산도야, 비금도야 울지 마라. 내 언젠가 다시 또 오련다."

/글·사진marryno5@fnnews.com

*협찬=가고 싶은 섬 시범사업 홍도 팸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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