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번의 대통령 직선제 ‘후보 단일화’가 승부 갈랐다

      2012.12.19 18:12   수정 : 2012.12.19 18:12기사원문


1987년 6.10 민주화운동으로 대통령 직선제가 실시된 이후 제13대 대선부터 다시 국민의 손으로 대통령을 선택해왔다. 이번 대통령은 직선제로 당선된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 대통령에 뒤이어 대한민국의 18대 대통령이 된다. 주요 대선에서 '후보 단일화'가 주요 이슈로 부각됐지만 시대에 맞는 이슈들로 판도는 수시로 변했다. 다만 일부 대선은 지지율 격차가 좁아지지 않은 채 일찌감치 결과가 정리되는 등 다양한 대선 판도가 전개됐다.

■직선제 부활, 野 단일화 실패

1987년 6월 항쟁 이후 군부 독재정치가 막을 내리면서 대통령 직선제가 부활했다.
이때 치러진 13대 대선에서는 김영삼, 김대중 후보가 단일화를 이루지 못하면서 노태우가 역대 최저 득표율 36.6%로 대통령에 당선됐다.

노태우는 박정희부터 전두환까지 이어진 군정을 종식시킨다며 "군의 개입으로 정치가 훼손되는 일을 단연코 막겠다"고 약속했다. 그는 6.29 선언에서 대통령 직선제를 능동적으로 받아들인 인물로 인식돼 강경파 군부 세력과 차별화됐고 상당한 지지를 얻을 수 있었다. 유세현장에서 외친 "나, 이 사람. 보통사람입니다. 믿어주세요"라는 말도 이와 같은 맥락이다.

13대 대선은 영남과 호남이 극명히 갈리는 결과를 냈다. 김영삼은 부산.경남에서, 김대중은 광주.전북.전남에서 압도적인 표를 얻었다. 당시 김영삼과 김대중의 득표율은 각각 28.03%, 27.04%로 당선자인 노태우와 근소한 차이를 보였다.

김영삼과 김대중이 단일화에 성공했다면 노태우를 충분히 누를 수 있었으나 서로의 차이를 극복하지 못했다. 김영삼의 상도동계와 김대중의 동교동계는 같은 야당으로 비슷한 정치적 성향을 가진 점을 제외하면 여야 관계와 별 차이가 없을 정도로 배타적이었기 때문에 단일화는 애시당초 힘든 과제였다.

게다가 양쪽 모두 양보할 수 없을 만큼 지지율도 비슷했기 때문에 어부지리 격으로 노태우가 당선된 셈이다. 민주화에 대한 국민들의 열망에도 양 후보가 평행선을 달리면서 완전히 군정을 끝내진 못했다는 평가다.

■문민정부 시대… 지역주의 계속

1992년 14대 대선은 군 출신 후보가 사라지고 순수 민간인 후보끼리 벌인 대결로 기록된다. 김영삼은 13대 대통령인 노태우가 이끌던 민주자유당 경선에서 대선후보로 선출, 가장 강력한 라이벌인 김대중을 꺾고 14대 대통령으로 선출되며 문민정부의 시대를 열었다.

김영삼은 42.0%의 득표율을 기록하며 33.8%를 기록한 김대중을 여유있게 따돌렸다. 14대 대선도 지역주의 정치에 기반한다. 김영삼은 부산, 경남에서 72.8%의 득표율을, 김대중은 호남에서 92%의 몰표를 받았다. 승패는 그 이외의 지역에서 났다. 김대중이 서울 외 다른 지역에서 우세를 확보하지 못한 반면 김영삼은 호남 외 모든 지역에서 고른 득표율을 보였다. 두 번 연속 민심의 선택을 받는 데 실패한 김대중은 14대 대선 패배를 계기로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김영삼, 김대중의 양자대결이 펼쳐진 가운데 현대그룹 고 정주영 회장의 출마도 눈에 띄었다. 정 전 회장은 당시 통일국민당을 창당, "집권자에게 수십, 수백억원씩 갖다 바치는 돈이 아까워 내가 한번 해봐야겠다고 생각했다"는 다소 충격적인 출마 이유를 밝히며 '아파트 반값 제공' 등의 파격적인 공약을 내걸었으나 예상보다 낮은 득표율(16.1%)을 기록한 채 고배를 마셨다.

■첫 정권교체… DJP 연합

1997년 치러진 제15대 대선은 김대중(DJ) 새정치국민회의 후보가 당선되면서 건국 50년 만의 첫 여야 정권교체를 이룬 선거로 기록된다.

김대중 후보의 득표율은 40.3%로 이회창 한나라당 후보(38.7%)를 1.6%포인트 차로 꺾었다. 한나라당 경선결과에 불복하고 국민신당을 차리며 제3세력으로 나선 이인제 후보의 득표율 19.2%가 승부의 한 축이 됐다.

감사원장과 국무총리직을 수행하면서 부각된 '대쪽 이미지'로 여당인 신한국당 대표가 된 이회창에 대한 지지율은 상승세였다. 신한국당 후보로 선출되자 이 후보의 지지율은 40%를 넘으며 1강 체제를 구축하는 듯했다.

그러나 두 아들에 대한 병역기피 의혹에 휘말리면서 지지율은 추락했고 당내 경선에서 경쟁했던 이인제 후보가 경선 결과에 불복하며 국민신당을 창당하자 기존의 지지율마저 빠졌다.

당시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이슈로 문민정부의 지지도까지 하락하면서 이회창 후보는 김영삼 대통령과의 거리두기에 나섰다. 결국 조순 민주당 후보와 연대해 신한국당을 해체하고 한나라당을 창당했다.

이에 맞서 김대중 후보는 김종필(JP) 자유민주연합 후보와 이른바 DJP 연합을 구축, 충청표심을 공략했다. 14대 대선 패배로 정계은퇴를 선언한 뒤 1995년 은퇴를 번복,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하며 후보에 나선 DJ는 단일후보로 대선에 나서 당선돼 '국민의 정부'를 구성했다.

■단일화 성공… 盧 승리

제16대 대선이 치러진 2002년 12월 19일, 노무현 새천년민주당 후보가 재도전에 나선 이회창 한나라당 후보를 득표율 2.3%포인트 차이로 누르고 당선됐다.

16대 대선은 노사모 등 네티즌의 영향력이 발휘된 선거로 평가받지만 동시에 당시 2002 한·일 월드컵의 성공적 개최로 부상한 정몽준 후보와 노 후보가 단일화에 성공하면서 '후보 단일화 카드'가 지지율 반등의 계기가 됐다.

이회창 후보는 당초 유력한 대선후보로 일찌감치 점쳐졌지만 또다시 두 아들의 병역기피 논란 등에 발목이 잡혔다.

본선 이전 민주당과 한나라당은 전국을 돌며 경선제를 거쳤지만 당시 민주당 내 10% 미만의 지지율을 극복하며 지지율 1위였던 이인제 후보를 꺾은 노무현 후보에 대한 지지가 급등했다.

그러나 이후 김대중 대통령의 두 아들인 김홍업과 김홍걸의 비리로 민주당과 노 후보 지지율이 하락했고 6·13 지방선거에서의 참패로 후보 재신임 사태까지 벌어졌다. 월드컵 열풍에 정몽준 당시 대한축구협회장의 지지율 급등에 노 후보에 대한 사퇴 요구가 거세졌지만 오히려 이 같은 정치적 압박은 여론의 지지를 받는 상황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결국 대선 한달 전까지 지지율 1강 체제를 이어오던 이회창 후보를 견제하기 위해 노 후보와 정 후보 간 단일화가 추진됐고 노 후보로 단일화가 성사된 후 지지율은 역전됐다. 대선 직전 정몽준 후보의 노 후보 지지 철회가 있었지만 역전된 지지율은 개표 결과로 이어졌다.

■최다 득표차, MB 당선

2007년 제17대 대선에선 '경제회복'을 내세운 이명박(MB) 한나라당 후보가 압도적인 표차이로 당선되며 10년 만에 정권교체가 이뤄졌다.

기업인 출신인 이명박 후보는 48.7%의 득표율을 기록, 26.1%에 그친 정동영 대통합민주신당 후보와 15.1%에 머물렀던 이회창 무소속 후보를 여유있게 제쳤다.

그러나 일찌감치 굳어진 1강2중 판세와 정책없는 폭로전이 이어지면서 63.0%란 사상 최저 투표율을 기록한 선거였다.

이명박 후보의 선거과정은 본선보다 당내 경선이 치열했다. 박근혜 후보와의 경쟁에서 선거인단에선 박 후보에게 뒤졌지만 여론조사에서의 우위로 가까스로 후보로 선출됐다.

이후 50%대 지지율로 일찌감치 앞서가던 이명박 후보는 대선을 한달여 앞두고 15, 16대 대선에 한나라당 후보로 나섰던 이회창 후보가 무소속으로 출마하면서 지지율이 30%대로 급락했다. 아울러 이명박 후보의 BBK 실소유주 및 주가조작 사건 연루 의혹이 제기됐다.

의혹의 핵심인 김경준 전 BBK 대표가 귀국하면서 대선 국면이 새로 전개되는 듯했지만 검찰이 대선을 2주 앞두고 해당 의혹에 대해 '무혐의'라고 결론지으며 이명박 후보 지지율은 40%대로 회복되면서 판세를 굳혔다.


17대 대선에선 주요 후보 외에도 문국현 창조한국당 후보가 주목받았다. 유한킴벌리 대표 출신의 문 후보는 5.8%의 득표율에 그쳤지만 대선 직후 총선에서 당선되는 기염을 토했다.
문 후보 외에도 권영길 민주노동당 후보의 득표율은 3.0%, 이인제 민주당 후보는 0.7%를 기록했다.

hjkim01@fnnews.com 김학재 김영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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