낡고 스러진 모습 그대로 시간이 멈춘 ‘태백 철암 탄광역사촌'

      2014.03.14 09:42   수정 : 2014.03.14 09:42기사원문
쿠르르릉…."

선탄장에 석탄 덩어리들이 쏟아지면 산 중턱에 돌 구르는 소리가 육중하다.

지하 수천m에서 캐 모은 탄 덩어리들이 수직갱을 통해 굴 밖으로 실려 나오면 산 중턱에 자그마한 검은 산 하나가 또 만들어진다.

이곳은 국내에 몇 남지 않은 '살아 있는' 탄광, 한국석탄공사 산하 철암역두 선탄장(등록문화재 제21호)이다.

국내 최초의 무연탄 선탄시설로 우리나라 산업화를 상징하는 대표적 시설이다. 태백 사람들은 석탄공사가 직영하는 이 장성광업소를 '석공'이라고 불렀다.

탄광은 예전 모습 그대로다. 야트막한 산 중턱을 온통 석탄 가루가 뒤덮고 있다.

무연탄과 잡석을 분리하고 석탄의 질과 종류를 구분하는 선탄작업이 벌어지는 곳이다.


이 선탄장과 마주보고 있는 건너편 산 중턱엔 삼방동 마을이 있다. 산비탈을 층층이 깎아 집터를 만들고 이곳에 올망졸망 집들이 들어서 제법 큰 마을이 형성됐다. 양쪽 산봉우리를 사이에 둔 골짜기에는 철암천이 조용히 흐르고 기차역과 상가 밀집지역, 시장이 들어서 철암 마을이 됐다.

'철암 탄광역사촌', 태백시가 이름 붙인 이곳엔 역사라는 말에 걸맞지 않게 아직 생업에 열심인 주민들이 있고, 탄광도 여전히 가동 중이다. 그러나 동네 개도 만원짜리를 물고 다녔다던 옛 영화는 온데간데 없는 쓸쓸한 시골 마을이다.

손님을 기다리는 식당 주인만 얼굴을 내밀고 있는 한적한 길가에 반가운 사람들이 찾아 왔다. 코레일에서 운영하는 관광열차가 철암역에 도착한 것이다. 빨강 노랑 등산복을 차려입은 도회지 사람들이 새까만 탄가루를 뒤집어쓴 선탄장과 묘한 조화를 이룬다. 이들은 삼삼오오 역을 빠져나와 100m가량 떨어진 옛날 철암역이 있던 자리에 다다랐다.

철암역은 일제강점기 말기인 1940년 8월 1일 영업을 시작했다. 태백지역에서 생산된 무연탄을 전국으로 발송했던 매우 큰 역이었으나 석탄산업합리화에 따른 석탄생산 감소로 지금은 명맥만 유지하고 있다.

탄광촌이 활황기였던 1970년대엔 서울 명동 거리만큼 붐볐던 곳이다. 그러나 지금은 주인이 떠난 한양다방, 봉화식당 같은 빈 건물만 남아 있다. 이곳에서 대한민국 에너지산업의 중추였던 1960~1970년대 탄광촌의 그 옛날로 시간여행이 시작된다.

철암이라는 산골 동네에 석탄이 없었다면 여긴 그저 화전민이 살았던 이름 없는 골짜기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국내에서 최대 규모를 다투는 석탄공사, 강원산업 등 주요 탄광이 밀집되면서 여느 도시 못지않은 규모로 성장했다. 현재 태백시 인구는 5만명이 채 못되는데 광산이 호황일 때는 12만명에 달해 강원도 최대 도시였다. 어떤 사람은 탄광촌에 발을 들인 이들을 '막장 인생'이라고 말했지만 그런데도 사람이 몰려든 데는 이유가 있었다. 당시 광부 월급은 공무원의 2~3배에 달했고, 연탄과 쌀은 공짜로 제공됐다. 자녀들은 3명까지 대학 학자금을 대줬다.

사람들이 모여들자 1962년엔 이 작은 마을에 서울 종로 거리에나 있을 법한 철암극장까지 등장했다. 다방과 술집은 수를 헤아릴 수 없었다. 당시 가장 유명한 식당 중 '대구관'이라는 곳이 있었는데 이곳 여주인은 얼굴이 말끔한 사람은 손님으로 받지 않았다고 한다. 광부들은 탄을 캐다 보면 눈가에 검은 자국이 생기는데 아무리 씻어도 지워지지 않아 공무원이나 사무원과 확연히 구분됐다. 대구관 여주인은 광부들의 호탕한 씀씀이를 알고 있었던 것이다. 석공 광부증명만 있으면 술은 얼마든지 외상을 줬다. 시집 오겠다는 처자도 줄을 섰다.

장사가 잘되다 보니 건물이 턱없이 부족했다. 철암역 앞엔 노점이 북적거려 매일 장이 섰다. 요즘 서울의 영등포나 동대문에 비견될 만한 문전성시였다. 노점도 부족해 건물을 증축하기 시작했다. 철암천을 등진 상가 밀집지역 건물들은 천변 쪽으로 발코니 형태의 공간을 증축하면서 하천 바닥에 기둥을 세워 떠받쳤다. 이 기둥 모양이 까치발 같다고 해서 사람들은 '까치발 건물'이라고 불렀다. 지금은 철암의 옛 영화를 증거하는 유물이 됐다. 몇 차례의 태풍으로 많은 까치발 건물이 쓸려 갔지만 현재 10여동이 남아 있어 시는 이 건물들을 보존하기로 했다.

철도 관광객이 가장 먼저 찾는 곳도 이 까치발 건물이다. 건물들은 주인이 모두 떠나고 허름한 간판만 남았다. "젊음의 양지, 중화요리 진주성, 봉화식당, 호남수퍼…." 최근까지도 영업을 했던 이 건물들의 낡은 겉모양도 앞으로 계속 보존될 예정이다.

밖에서 보면 그냥 폐점한 가게지만 건물 안으로 들어가면 철암의 옛날을 추억할 수 있는 다양한 전시공간이 펼쳐진다. '호남수퍼'는 현대적 회화를 전시하는 갤러리가 됐고, '진주성'은 특산물 판매점으로 태어났다. 주점인 '젊음의 양지'에는 설치미술, '제일다방' 옥상은 선탄장을 바라볼 수 있는 분위기 좋은 목조 전망대로 꾸몄다.

전시물 중에 탄광에서 일하는 동생에게 고향에 있는 형이 보낸 편지가 눈에 띄었다. 돈이 궁했던 형이 동생에게 거듭 미안한 마음을 전하면서 급전을 부탁하는 내용이다.

"내가 가릴 돈 십만원이 그날이 기한이니 동생이 난처하지만 몇 달만 좀 보아 주었으면…(중략)…5월 25일날 돈을 못 구하게 되면 큰 변이 있을 것 같군. 미안한 말이지만 요사이 집에 있기도 싫은 생각이 하루에도 몇 번씩 나는군"(철자 교정·원문 사진 참고)

까치발 건물 뒤로 흐르는 철암천을 따라 가파른 계단을 오르면 동네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산 중턱에 오르게 된다. 여기가 옛날 광부들이 모여 살던 삼방동 마을이다. 서울의 달동네를 연상시키는 좁은 골목이 얼기설기 이어져 집 하나 끼고 돌면 골목이 나오고, 골목이 끝났다 싶으면 또 대문이 드러나는 미로 같은 동네다.

지금은 거의 빈집으로 지역 화가들이 그려 놓은 벽화만 낯선 관광객을 맞이하고 있다. 골목을 산책 삼아 걷다 보니 어느 한 집에서 아저씨 한 분이 고개를 내민다. "탄광마을을 좋게 꾸며 놓아 구경할 것들이 많아졌다고 해서 찾아온 기자"라고 소개했더니 집안으로 들어 오라며 믹스커피 한 잔을 권했다.

탄광에서 운전직으로 수십년 일했던 고영간씨(66)는 이 마을이 과거에 어땠는지 묻자 금세 얼굴이 밝아지면서 "그땐 참 좋았지요. 탄광에서 보수가 나오는 날이면 온 동네가 들썩거렸으니까"라고 말했다. 고씨는 자녀들을 다 공부시켜 도시로 보내고 자신과 부인 둘만 삼방동을 지키고 있었다. 고씨는 "이 마을에서 젊을 때부터 살았고 익숙하니까 떠날 생각은 없다"며 "시에서 새롭게 개발해서 좋게 바꿔 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1990년대 석탄산업합리화로 탄광시대가 막을 내리면서 철암은 급속히 쇠퇴했다. 급작스러운 변화로 많은 사람이 직장을 잃고 마을을 떠났지만 당시의 마을 풍경이 비교적 잘 보존됐다는 것이 요즘엔 다행스러운 일로 여겨진다. 살아 있는 탄광촌의 모습을 간직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기 때문이다. 물론 낡은 옛 모습을 쓸어버리고 현대식 건물을 지어 관광객을 받자고 주장을 하는 사람도 있지만 탄광촌의 역사가 사라지고 개성도, 사연도 없는 현대식 건물을 보러 올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지난날 전국적으로 탄광촌을 리모델링하는 사업이 붐을 이뤘다. 현대화한답시고 탄가루 묻은 옛 건물과 시설을 모두 걷어낸 뒤 잔디밭 깔고 주차장 짓고, 태양열발전 패널을 세웠던 곳들은 현재 아무도 찾지 않는 박제된 시설로 전락했다. 탄광을 재현한다며 세워둔 플라스틱 모조품과 밀랍인형은 불 꺼진 전시실 한쪽을 장식할 뿐이다.

그런데 철암은 다행히 이제 개발을 시작했다.
옛 탄광마을의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어 역사의 기운을 내뿜고 있다. 역사촌 운영을 맡은 태백탄광문화연구소도 옛 모습을 살리는 것이 중요한 가치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태백탄광문화연구소 김기동 대표는 "탄광촌의 옛 영화를 회복할 수는 없겠지만 지역주민과 연계성을 가지면서 관광지로서 새로 태어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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