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기 ‘엔저 공포’에 울고.. 정부, 커지는 ‘D공포’에 떤다
#1. 일본 제조업체와 카메라 모듈 납품 계약을 맺고 있는 A사는 엔저 공포에 휩싸여 있다. 엔저로 매달 10~15%가량 수익이 줄고 있다. 결제 통화를 엔화 대신 달러로 바꾸자니 치솟는 원화값에 이마저도 여의치 않은 상황이다. 그는 "엔저로 가격경쟁력이 급격히 떨어지고 있다"고 하소연한다.
#2. 서울 공덕동에 사는 주부 이모씨(43)는 다음 달 전세 재계약을 앞두고 걱정이다.
2년 전 3억원대 초반이었던 82.6㎡(약 25평) 아파트 전세금이 현재 3억7000만원으로 훌쩍 뛰었기 때문이다. 추가 부담에 3.25~4.03%의 주택담보 대출금리까지 만만치 않다. 게다가 높은 생활물가가 걱정을 더했다.
'고(高) 원화가치-저(低)성장·저물가·저금리'. 한국경제가 현재 처한 '1고 3저의 덫'이다.
당장 달러화에 견준 원화 값이 최근 한달 새 4%가량 급등하면서 수출기업들의 주름살이 늘고 있다. 여기에 경제 전반을 덮친 '저성장·저물가'현상에 'D(Deflation·일반적 물가수준의 하락에 따른 경기무기력 현상)의 공포'까지 다시 고개를 들고 있다. 기업과 서민들의 어깨가 무겁다.
■원화강세 실물·금융 시장엔
8일 서울 외환시장에서 원·달러 환율은 전날보다 0.1원 오른 1022.6원에 마감했다. 급락세는 진정됐지만 하향추세가 지속될 것이란 데 무게가 실리고 있다.
시장에서는 외환시장의 흐름에 우려의 시선을 거두지 않고 있다. 수출 중심의 소규모 개방경제 구조 때문이다. 온기운 숭실대 교수의 '주요국 환율의 수출가격 전가율 비교분석과 시사점'이란 논문에 따르면 2009년 1·4분기~2013년 1·4분기 달러화에 대한 원화의 환율 전가율은 0.540이었다. 이는 1차 절상시기(2002년 1·4분기∼2007년 4·4분기분기) 때 0.239보다 높아졌다. 수출가격 전가율이 0.54라는 것은 원.달러 환율이 1% 하락(원화가치 절상)할 때 한국의 수출기업들이 달러 표시 수출가격을 0.54% 올렸다는 의미다.
지난해 수출액은 5596억3240만달러(약 600조원)로 1973년(32억2500만달러)의 173배로 불었지만 문 닫는 가게와 공장이 넘쳐난다.
다른 한편에선 한국이 글로벌 통화전쟁의 희생양이 되는 것 아니냐는 걱정이 고개를 든다. 1997년 외환위기의 공포를 떠올리고 있는 것. 그 시발점인 1994년 글로벌 경제상황과 많이 닮아있기 때문이다. 불황에서 허우적대던 미국 경기가 활기를 되찾자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는 확장적 통화정책을 긴축으로 급선회한다. 그러자 미국시장을 떠나 중남미에 둥지를 틀었던 외화자금이 이탈했고, 심각한 금융위기가 터졌다.
실제 글로벌 각국은 경쟁적으로 통화가치 하락을 유도하는 정책을 펼치면서 글로벌 통화전쟁에 나선 모양새다. 오정근 한국경제연구원 초빙연구위원은 '신(新)글로벌 통화전쟁의 영향과 정책대응' 논문을 통해 "통화전쟁의 표적이 한국·중국 등이 될 것"이라고 걱정하고 있다.
신통화전쟁에도 9일 열리는 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회에 대한 기대감은 크지 않다. 신한금융투자 윤창용 이코노미스트는 "이주열 총재 취임 이후 처음 열린 지난달 금융통화위원회의 분위기를 감안하면, 원화절상 압력을 억누를 수 있는 기준금리 인하 가능성은 사실상 물 건너갔다"면서 "대내적 측면에서는 원화강세 압력이 계속되고 있다"고 진단했다.
■우려감 커진 한국경제
'서서히 뜨거워지는 물속의 개구리 같다'(리처드 돕스 맥킨지 글로벌 인스티튜트 소장). 한국경제를 두고 나온 외국계 컨설팅 업체의 섬뜩한 경고다. 박근혜 대통령까지 이를 화두로 꺼내들 정도다.
당장 큰 걱정은 내수다. 많은 암초가 소비를 가로막고 있기 때문이다. 가계빚 부담(1000조원 시대)에 서민들은 허리띠를 바짝 졸라맸다. 내수위축이 불가피한 상황이다. 한국경영자총협회가 실시한 '2014년 경제전망 조사'에 따르면 248개사 최고경영자(CEO)들이 가장 많이 꼽은 애로사항은 '내수부진'(33%)이었다. 과도한 빚 부담에 위축된 소비여력이 '긴축경영'으로 이어져 '투자축소→고용감소(소비침체)→기업이익 감소'라는 악순환 고리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 세월호 참사 여파는 민간 소비에 복병으로 등장했다. 또 지난 3월 생산자물가는 1년 전에 견줘 0.5% 떨어졌지만 학원비, 공공요금, 축산물 등 서민생활에 밀접한 항목들은 오름세다.
노무라는 "한국의 4월 민간 소비가 전월보다 3% 감소할 것"이라며 "5∼6월 중 민간 소비가 다시 회복 조짐을 보이겠지만 단기간 내에 완전히 회복되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진단했다.
'저물가'에 대한 공포도 점증하고 있다. 고환율의 역효과다. 경상수지 흑자의 구조적 정착과 이에 따른 원화강세 기조가 '수입물가 하락→국내물가 하락 압력'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
속설이지만 '고혈압보다 저혈압이 더 무섭다'는 말이 있다. 당장 체감 고통은 크지 않지만 저물가가 장기화되면 경제 활력이 떨어지고 실질금리(명목금리-물가상승률) 상승으로 빚 부담은 늘어난다. 저물가가 지속되면서 디플레이션(물가하락.경기침체) 우려가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 같은 현실에도 한은은 지난해 5월 딱 한 차례 금리를 내린 바 있다.
시장에서는 '저성장·저물가'를 디플레이션의 위험신호로 해석한다.
과거 일본도 1990년대 중반부터 디플레이션 우려가 기업과 소비자들을 짓눌렀다. 소비는 위축되고 자산가격 하락과 함께 기업 투자가 줄면서 내수가 침체의 늪에 빠져들었다.현대경제연구원 김천구 연구위원은 "통화 당국은 수요부진이 장기화될 경우 시장 상황에 선제적이고 지속적인 대응을 통해 경제 주체의 기대를 긍정적인 방향으로 유도해야 한다"며 "기준금리가 단기금리, 장기금리, 은행 예금.대출금리로 파급되는 경로를 효율화하기 위한 방안도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kmh@fnnews.com 김문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