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송논쟁과 세월호

      2014.09.01 16:56   수정 : 2015.07.15 21:18기사원문

효종(재위 1649∼1659년)이 죽자 상복(喪服)을 놓고 논쟁이 붙었다. 효종은 인조의 둘째 아들이다. 장남 소현세자가 죽었기 때문에 차남이 왕위를 계승했다. 이때 효종의 계모인 자의대비는 살아 있었다. 집권 서인(西人)은 자의대비가 1년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왕이라도 장자가 아니면 부모가 1년복을 입는 게 맞다는 것이다. 야당 남인(南人)은 3년복을 내세웠다. 차남이라도 임금이 됐으면 장자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 이른바 1차 예송(禮訟)논쟁이다.

의 속마음은 3년복에 있었다. 차남이라고 왕을 우습게 아는 서인들이 미웠다. 하지만 인조반정 때 공을 세운 서인을 무시할 수 없었다. 결국 자의대비의 상복은 1년복으로 낙착된다.

남인은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 윤휴가 서인의 영수 송시열에게 칼을 겨눈다. 둘은 앙숙이다. 송시열은 중국 송나라 주자를 절대진리로 섬겼다. 주자가 해석한 논어·맹자는 한 자 한 획도 고칠 수 없다고 믿었다. 윤휴는 콧방귀를 뀌었다. 그는 "주자의 '중용집주'를 개작해 내 견해로 주석을 달겠다"고 나섰다. 송시열은 윤휴를 사문난적(斯文亂賊) 곧 주자학을 어지럽힌 이단으로 취급했다. '어부사시사'로 유명한 윤선도는 남인 강경파였다. 윤선도는 송시열이 효종의 적통(嫡統)을 부인한 역적이라는 투로 비난했다. 이로써 예송논쟁은 효종 나아가 효종의 아들인 현종의 정통성 시비로 비화했다.

15년 뒤 효종비 인선왕후가 죽었다. 이때도 자의대비가 살아 있었다. 인선왕후를 맏며느리로 보면 1년복, 둘째 며느리로 보면 9개월복이다. 아니나 다를까, 남인은 1년복, 서인은 9개월복을 주장했다. 2차 예송논쟁이다. 현종은 1년복을 택했다. 서인들은 대놓고 왕에게 대들었다. 이를 괘씸히 여긴 현종은 정권을 갈아치울 결심을 한다. 하지만 재위 15년, 34세 한창 나이에 타계함으로써 뜻을 이루지 못한다.

현종의 뜻은 아들 숙종이 잇는다. 숙종은 즉위하자마자 서인에 대한 숙청을 단행한다. 빈 자리는 남인으로 채웠다. 윤휴 등 남인 강경파는 이를 갈며 송시열 등 서인 세력을 도륙하려 했다. 하지만 영의정 허적은 공존을 모색한다. 여기서 강경파 청남(淸南)과 온건파 탁남(濁南)이 갈라진다. 숙종은 탁남을 중용했다.

잘나갈 때 조심해야 한다. 권세가 하늘을 찌르던 허적이 큰 잔치를 베풀었다. 마침 비가 내리자 궁에서 쓰는 기름장막을 임금 허락도 없이 갖다 썼다. 뒤늦게 이를 안 숙종이 진노했다. 6년 만에 남인 정권은 실각한다. 역사는 이를 경신환국(庚申換局)으로 기록한다. 경신년(1680년)의 정권교체란 뜻이다. 다시 서인 세상이 왔다. 보복이 시작된다. 허적과 윤휴는 사약을 받는다.

윤증(尹拯·1629∼1714년)은 서인이다. 하지만 남인과도 가깝게 지냈다. 학자로 존경받던 윤증은 숙종의 부름을 받는다. 그는 먼저 남인의 원한을 풀 것, 남인 인재를 등용하는 탕평책을 쓸 것 등을 요구한다. 이 같은 조건이 무산되자 윤증은 출사를 포기한다. 이는 서인이 강경파 송시열 중심의 노론(老論), 온건파 윤증 중심의 소론(小論)으로 갈리는 계기가 된다.

예송논쟁에 대한 윤증의 탄식을 들어보자. "3년복을 가지고 서로 싸운 지 10년이 되었는데 혹 이쪽이 옳고 저쪽이 그르다한들 무슨 큰 해가 되겠는가…. 그 발단을 살펴보면 별 문제도 안 되는 복제설 하나뿐이니 이 어찌 우습고 기괴한 일이 아니겠는가."(이덕일 '송시열과 그들의 나라')

강경파가 득세하는 세상은 살벌하다. 윤증이 제자리를 찾지 못한 것은 조선의 비극이다. 예송논쟁은 민생과 무관했다. 오로지 정치꾼들의 당파적 이익만 있었다. 윤증 말마따나 상복을 얼마동안 입는 게 뭐 그리 대수인가. 예송논쟁 이후 350년이 흐른 지금도 우리 정치엔 강경파만 득실거린다.
상대방을 인정하는 합리주의자에겐 배신자 낙인이 찍힌다. 민생을 도외시한 그들만의 리그에 진저리가 날 지경이다.
세월호 정국에서 예송논쟁의 질긴 흔적을 본다.

paulk@fnnews.com 곽인찬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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