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살리기와 기업인의 '죄와 벌'

      2014.09.30 17:12   수정 : 2014.09.30 22:49기사원문

부자에게 징역형 대신 거액의 벌금을 내도록 하면 어떨까. 대상자의 재산을 감안해 하루 최고 1억원이라도 지불함으로써 처벌을 대신할 수 있게 허용하는 것이다. 당장 형평성 위반, 유전무죄 무전유죄 등 비난이 쏟아질 게 틀림없다. 반면 같은 잘못이라도 부자에게 더 무거운 벌금을 매기는 건 어떨까. 동일한 속도위반을 했지만 6만원 등 정액제 대신 부자에게는 재산에 비례해 최대 1억원까지 범칙금을 물리는 것이다. 비난이 나오더라도 앞의 얘기보다는 덜하지 싶다. 알려진 사실이지만 소득에 따라 벌금 액수를 다르게 하는 시스템은 외국에서 시행되고 있다.

핀란드 노키아 사의 안시 반요키 부회장은 제한시속 50㎞ 구간에서 75㎞로 오토바이를 달리다가 11만6000유로(약 1억5000만원)의 벌금을 물었다. 핀란드 육가공업체 상속자인 살로노야가 헬싱키 시내에서 시속 40㎞ 제한 도로를 80㎞로 달린 결과 교통범칙금 사상 세계 최고액인 17만유로(약 2억7000만원)를 물었다는 전설(?)도 있다. 같은 제도는 스웨덴·덴마크·독일· 프랑스 등에서도 시행 중이거나 도입을 검토 중이다. 이른바 동등희생의 원칙이다. 이게 가능하다면 앞의 '처벌 대신 벌금' 제도 역시 못할 것도 없다. 혁명적인 생각도 아니다. 미국에서 법무부가 수사대상자와 형사기소 대신 거액의 벌금 납부조건으로 합의했다는 소식은 수시로 들린다. 대표적인 게 2008년 금융위기를 초래한 부실 주택담보부증권 판매 혐의로 수사를 받던 미국 은행들과 법무부 사이의 합의 거래였다.

올해 뱅크오브아메리카(BoA)는 170억달러(약 17조원), 씨티그룹은 70억달러(약 7조원), JP모간체이스(체이스)은행은 지난해 130억달러(약 13조7280억원)에 달하는 천문학적 벌금을 내기로 각각 법무부와 합의했다. 물론 형사처벌과는 별개라는 단서가 꼭 따라붙었지만 이런 경우 책임자급 기업인에 대한 형사기소는 없다고 봐야 한다. 반면 돈으로 때우기 어려운 실무자는 재판에 넘겨져 고생하고 있는 미국판 무전유죄 경우가 보도되기도 한다. 그래도 근본적 비난이 없는 이유는 BoA가 내기로 한 돈 중 70억~80억달러, 체이스의 합의금 중 40억달러 정도가 피해자 구제기금으로 쓰일 예정이기 때문이다. 능력이 있다면 형사처벌 대신 돈을 내는 게 실리적으로 낫다는 것을 보여준다. 한마디로 미국식 실용주의다.

황교안 법무부 장관과 최경환 부총리가 '기업인 선처' 가능성을 언급하면서 국민적 관심이 쏠리고 있다. 경제 살리기를 위해 최태원 SK그룹 회장, 이재현 CJ그룹 회장 등 수감 중인 기업인들에게 경영 복귀 기회를 주어야 한다는 게 명분이다. 당연히 유전무죄, 법치주의 파괴 등 반대 목소리가 크다. 박근혜 대통령이 사면권 남용 제한을 공약했던 터라 청와대도 신중하다. 재계가 기업인 선처론을 반기면서도 드러내놓고 말하기 어려운 이유다. 찬성하는 측도 '기업인에게 특혜도 불이익도 안된다'는 원론적 입장이다. 국민정서법을 위반할까 조심하는 눈치다. 물론 기업인들에 대한 무조건적 선처는 신중해야 한다. 하지만 기업인들에 대해 감옥에 가두어 놓는 형사처벌만이 능사인지는 의문이다.

북유럽식 동등희생이든, 미국식 실용주의든 기업인들이 자신이 잘할 수 있는 방법으로 사회에 기여하도록 하는 방안은 충분히 고려해 볼 만하다. 지금은 누진세를 누구나 당연하게 여긴다.
그러나 누진세 제도가 공산주의적 발상이라는 이유로 한때 미국에서 위헌판결을 받은 바 있는 역사를 상기하면 더욱 그렇다.



경희대학교 법과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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