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베트남 다낭항, 동·서양 문화 잇는 동남아 해양 플랫폼

      2014.10.05 17:40   수정 : 2014.10.05 17:40기사원문


지난달 23일 해양실크로드 탐험대를 싣고 중국 광저우항을 떠난 한바다호는 이틀 만인 25일 새벽 베트남 다낭항에 도착했다.

다낭은 호찌민과 하노이, 하이퐁과 함께 베트남 4대 도시에 속한다. 참어(Cham語)의 '큰 강의 입구'라는 단어에서 유래한 다낭은 2세기부터 19세기 중반까지 약 2000년 동안 번성했던 참파(占婆)왕국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6세기 참파왕국의 수도로 힌두교와 불교의 흔적을 남기고 있는 인드라의 도시인 '인드라프라', 4~14세기 베트남 중부에서 남부에 걸친 참파왕국의 종교적 성지로 위대한 아시아 문명 발전과 변화를 보여주는 '미선 유적지', 15세기부터 19세기 전반까지 동남아 교역 해항도시였던 '호이안', 19세기 초 베트남 마지막 왕조의 요새성이 있는 '후에', 이들 모두가 다낭 주변에 있다.

다낭에서는 이제까지 보아온 베트남 사람들과는 조금 다른 외모에 이슬람 복장을 하고 있는 이들을 만날 수 있다.
소수민족인 참인이다. 이들 선조의 위업은 다낭 시내에 있는 참파 석조물 300여점을 보존하고 있는 '참박물관'에 남아 있다. 둘러 보면 인도와 아랍세계가 세계 교역을 주도하던 시기에 다낭이 해양실크로드상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며 번영을 누렸음을 알 수 있다.

베트남 왕조의 영향권하에 들어간 19세기 중반에도 다낭이 갖고 있는 해양실크로드상의 문화교섭 장소로서의 위상은 더욱 높아졌다. 베트남의 민망황제는 다낭을 제외하고는 그 어느 항구에도 유럽선박이 닻을 내릴 수 없다는 칙령을 내렸다.

베트남의 쇄국시기 유일하게 열린 이 해항도시에 유럽의 문물이 들어오고 베트남의 문물이 나가면서 다낭은 최대의 상업항이자 문화의 멜팅폿이 됐다. 프랑스가 베트남의 여타 지역보다도 제일 먼저 다낭을 치고 들어온 것은 우연이 아니었던 셈이다. 베트남 전역에 식민지배권을 확립한 프랑스는 19세기 말 자기식대로 다낭을 음역해 투란(Tourane)이라고 명명하고 직할시로 경영했다. 이후 다낭은 유럽 모델에 따른 인프라를 갖추고 동서양을 잇는 해양실크로드상의 주요 해항도시로 성장했다.

남베트남 시기에 다낭은 이제까지와는 또 다른 외부인들을 맞으며 변화했다. 이들은 다름 아닌 미군과 한국군이었다. 미국 해군과 공군이 다낭에 기착했다. 한국의 청룡부대도 이곳에 주둔했다.

다낭은 앞으로도 새로운 문화를 유통시키고 상생시키는 해양실크로드상의 중요한 거점으로 기능할 것으로 보인다.
단순히 베트남 혹은 베트남 중부지방의 관문만이 아니라 내륙국가 라오스의 해상활동까지를 담당하는 주요 해양 플랫폼이다.

베트남, 라오스, 태국, 미얀마로 이어지는 동서경제지대(EWEC·East-West Economic Corridor)의 동쪽 끝에 위치한 해항도시로 다낭에 주목하면 우리의 해양실크로드는 더욱 더 넓어질 것이다.


해양실크로드 탐험대를 태운 한국해양대 실습선 한바다호는 지난달 27일 베트남 다낭항을 떠나 세 번째 기항지인 인도네시아 자카르타항으로 향했다.

노영순 한국해양대 국제해양문제연구소 HK교수 <fn·부산fn·한국해양대 국제해양문제硏 공동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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