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페르시아~신라 연결 바닷길 '이란 반다르 아바스' (下)

      2014.11.11 11:32   수정 : 2014.11.11 18:17기사원문


페르시아만에서 중국 광저우에 이르는 바닷길 9600㎞는 지난 7~9세기부터 활성화된다. 오만정부는 1981년 당시 다우선을 건조해 '소하르'라 명명하고 수르에서 광저우에 이르는 바닷길을 재현했다. 소하르는 신밧드의 고향으로 알려진 곳으로 무스카트가 오만 중심항이 되기 이전 가장 번창한 해항이었다. 소하르는 현재 정부청사가 집결한 무스카트의 알 부스탄 거리에 전시돼 있다.

오만정부는 '신밧드의 모험'에 등장하는 아랍 뱃사람들의 이야기는 바로 오만 선조들의 해양활동이라고 자부한다. 오만인들 못지않게 선조들의 해양활동을 자부심으로 내세우는 또 다른 민족은 이란인들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이란인들은 아랍제국에 점령당한 7세기 중엽 이후에도 100여년 이상 해상교역을 주도했다. 7세기 활동한 중국 승려 의정의 '대당서역구법고승전'에 따르면 페르시아어를 사용하는 이란인들 '포세'(Po-sse)와 아랍어를 사용하는 이란인들 '타쉬'(Ta-shih)가 해상교역을 주도했다.



이들이 나들목으로 이용한 항구는 반다르아바스와 광저우였다. 그런데 정사는 아니지만 반다르아바스에서 경주까지 인적 물적·교류가 바닷길을 통해 왕성했을 것이라는 전승기록이 최근 새삼 주목받는다. 반다르아바스에 입항한 해양실크로드 탐험대를 이란국민들이 따뜻하게 환대한 것도 이런 움직임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사산왕조 페르시아가 아랍인들의 침입을 받아 651년 멸망하자 이슬람 정복 이전 역사 속의 민족영웅들을 다룬 페르시아 문학이 탄생한다.

이란의 민족시인 피르다우시가 977년부터 1010년까지 30년에 걸쳐 쓴 이란 민족 대서사시 '샤나메'(Shah-nameh·'왕들에 관한 이야기')를 쓴다. 그는 아랍 지배자들이 아랍어와 아랍문학을 강제하는데 반발해 페르시아어로 이란의 전설과 역사를 서술해 이란 민족의 부활을 열망했다.

'왕들에 관한 이야기'가 이란인들 사이에서 인기를 끌자 유사한 저술들이 많이 등장한다. 그 가운데 하나가 '쿠쉬나메'(Kush-nameh·'쿠쉬에 관한 이야기')다.

쿠쉬나메에 따르면 몰락한 사산왕조의 유족인 압틴(abtin)은 쿠쉬의 추적을 피해 중국에서 바실라(Basila)로 망명한다. 바실라에 도착한 압틴은 그곳 공주 파라랑(Fararang)과 결혼한다. 그는 공주와 함께 바실라 항해자의 도움을 받아 14개월간의 항해 끝에 이란으로 돌아간다. 파라랑은 이란의 민족 영웅으로 칭송받게 되는 파리둔(Faridun)을 낳는다. 파리둔은 아버지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아랍의 지배로부터 왕위를 재탈환한다. 여기서 바실라는 신라일 것으로 추정한다.

이 설화는 신라에서 이란에 이르는 바닷길이 신라와 이란의 항해자들에 의해 숙지되고 주기적으로 활용됐다는 것을 암시한다. 이란으로 연결되는 바닷길의 결절점인 해항은 반다르아바스였을 것이다.

반다르아바스가 동남아의 여러 해항도시들과 왕성한 인적·물적 교류를 했다는 것은 역사적으로 충분히 고증된다. 630년 반다르아바스의 지도자 라자(Maharaja Debar Raja)는 아랍제국의 공격을 견디다 못해 스리랑카로 망명한다.

그는 여기서 다시 뱃길을 따라 말레이시아의 케다에 정착하며 힌두교를 신봉하는 원주민들의 추대를 받아 왕위에 올라 케다왕국을 창건한다.

케다 연대기는 반다르아바스 출신의 라자가 랑카수카(Lankasuka) 왕국을 대체해 634년 힌두교를 국교로 하는 케다왕국을 건국했고 1136년 이슬람으로 개종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반다르아바스는 '파르시'(Parsi)가 종교자유를 찾아 집단적으로 이주한 해항이었다. 8세기께 반다르 아바스에 근거지를 둔 조로아스터교를 믿는 이란인들은 이슬람교도의 탄압을 피해 인도의 구자라트로 이주한다. 인도에 정착한 이들을 '파르시'라 부른다. 18세기 영국의 동인도회사 상관이 뭄바이로 이전하자 파르시의 대다수도 함께 이동했다. 이들은 면방적업을 필두로 인도의 철강, 항공 등의 중공업을 주도했으며 거상이 많아 인도 민족자본가를 대변했다. 오늘날 뭄바이 랜드마크의 하나인 타지마할 호텔은 세계적인 재벌 타타 그룹의 창시자인 파르시, 타타(1838-1904)가 세운 것이다.

파르시는 경제계 이외에도 예술, 사회개혁, 복지, 교육계에서 인도의 엘리트층을 형성하고 있지만 조장(사체를 새에게 먹게 하는 장례)과 같은 전통적인 조로아스터교의 관습을 현재도 유지하고 있다.

반다르아바스는 지속적인 전쟁의 상흔으로 인해 화려한 볼거리를 제공하지는 못한다.
하지만 반다르 아바스와 관련된 신화·설화, 서사시, 디아스포라의 역사는 이 해항도시가 페르시아에서 신라까지 연결된 바닷길의 결절점이었고 쉬라즈~이스파한으로 통해 육상실크로드와 연결됐다는 것을 보여준다. 정문수 교수

한국해양대 국제해양문제연구소장 <fn·부산fn·한국해양대 국제해양문제硏 공동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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