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웅섭 금감원장의 편지
2014.12.28 16:47
수정 : 2014.12.28 16:47기사원문
9월 말 저녁이었다. 진웅섭 금융감독원장(당시 정책금융공사 사장)을 만났다. 몸이 안 좋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몸살 기운이 있다고 했다. 진 원장은 그때 함께한 사람들에게 딸과 약속한 것이 있다고 했다. '앞으로 10년간 에쿠스를 타겠다는 약속'이라고 소개했다. 산업은행과 합쳐지는 정책금융공사 사장 임기를 불과 3개월 앞둔 상황이었다. 함께한 기자들은 진 원장이 민간기업 최고경영자(CEO)로 가는 줄로 이해했다. 그리고 언감생심의 심정으로 어디라도 자리를 잘 잡았으면 좋겠다는 너스레까지 떨었다.
그리고 한달여가 흐른 지난 11월. 그는 최연소 금감원장으로 깜짝 발탁돼 취임했다. 그때서야 고개가 끄덕여졌다. 10년 동안 에쿠스를 타겠다던 약속의 의미를. 축하 문자를 보냈다. 그랬더니 '하나님이 밥 굶기시겠냐는 제 지론의 다른 표현입니다'라고 답장이 왔다.
진 원장 취임 이후 금감원은 한마디로 정중동이다. 진중하고 조심스러운 진 원장의 스타일이 읽힌다. '조용한 금융시장의 파수꾼'을 강조하는 그다. 예전처럼 '중계방송'식의 검사를 자제하고, 소리 없이 움직이겠다는 포석이다.
바둑 용어에 나오는 착안대국 착수소국(着眼大局 着手小局)이란 말이 떠오른다. 대국적으로 생각하고 멀리 보되 실행은 한 수 한 수에 집중함으로써 작은 성공을 모아 나가는 것이 승리의 길이라는 뜻이다.
최근 진 원장은 직원들에게 e메일로 편지를 보냈다. '즐거운 성탄과 행복한 연말 되시기를 기원하며'란 편지였다. 그는 "무엇보다도 여러분과 함께 열어 갈 새로운 날들이 다가오고 있어 그 어느 때보다 설레고 기대된다"면서 "한 조직의 구성원이 된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행복한 일임과 동시에 책임감을 가지는 일"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피천득님이 되고 싶어했던 '무음(無音)을 연주하는 플루트 플레이어'처럼 개개인이 맡은 업무에 최선을 다하자"고 했다.
진 원장의 편지에는 시도 한 편 들어 있었다. 정호승 시인의 '희망을 만드는 사람이 되라'였다. '이 세상 사람들 모두 잠들고/어둠 속에 갇혀서 꿈조차 잠이 들 때/홀로 일어난 새벽을 두려워 말고/별을 보고 걸어가는 사람이 되라/희망을 만드는 사람이 되라…절망도 없는 이 절망의 세상/슬픔도 없는 이 슬픔의 세상/사랑하며 살아가면 봄눈이 온다…'
진 원장은 시를 통해 금감원이 희망을 주는 조직으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고 주문한 것이다. 그리고 '소리 없이 강한 조직'을 강조했다. 그는 "때로는 일이 힘들고 세상이 우리가 하는 일을 몰라줄지라도 광장의 나무가 한겨울의 혹독함을 이기고 봄에 잎을 틔우듯 '나'라는 개인보다는 '우리'라는 함께가 되어 서로 따스한 격려와 감사의 마음을 전하며 같이 가자"고 했다.
최근 만난 금감원의 한 임원은 진 원장의 편지에 감동했단다. 윽박과 호통에 불안했던 삶이 일상이었던 옛날이 생각났던 것일까.
그는 "뇌의 전두엽은 의도적으로 활동하는 것과 행동조절 기능을 갖고 있는데 신뢰가 쌓일 때 발달한다"면서 "움츠러들 수밖에 없었던 공포가 사라진 세상이 온 듯하다"고 했다. 그는 편지와 함께 온 시를 읽고 진 원장의 '따뜻한 리더십'을 실감했단다.
임원인사 등 대규모 인사를 앞둔 금감원이다. '우리'를 강조했던 진 원장이 '혁신'과 '안정' 가운데 어떤 카드를 선택할지 궁금해진다.
sdpark@fnnews.com 박승덕 증권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