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 21세기 사관, 그들의 손 끝에서 역사가 기록된다

      2015.04.08 17:44   수정 : 2015.04.09 10:26기사원문
국회 속기사, 빠른 손보다 듣는 귀가 중요하다



국회 속기사들은 '현대판 사관'으로 불린다. 국회의원들의 공식 행사와 회의에 참석해 속기록을 남기는 속기사들을 보면 조선시대 사관들이 임금과 가까운 곳에 앉아 언행을 낱낱이 기록했던 모습이 연상된다. 조선시대 사관은 궁궐에서 숙직하면서 조정 행사와 회의가 열리면 임금의 지근거리에서 속기록이라 할 수 있는 사초를 작성했다. 국회가 바쁘게 돌아갈 때면 숙직과 다름없는 생활을 하는 속기사들의 일상도 사관의 삶과 닮았다. 최근 다양하게 전개되는 입법활동으로 인해 바쁜 일정 속에서도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역사의 현장을 묵묵하게 지키는 '속기사의 꽃' 국회 속기사들을 4월 임시국회 둘째날인 8일 만나봤다.




■'손'보다 '귀'가 중요한 공복

대한민국에서 가장 많은 '말'이 오가는 여의도동 1번지 국회. 한시도 쉬지 않고 쏟아지는 말을 고스란히 기록하는 속기사에게 가장 궁금한 질문은 역시 '얼마나 빨리 받아칠 수 있는가'였다. 하지만 빠르게 쓴다는 뜻의 '속기'라는 말에서 연상되는 이 같은 단순한 궁금증에 15년차 속기사로 현장에서 뛰는 최고참급 속기사 최혜련 주무관은 "속도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고 잘라 말했다. 매일 바뀌는 정책 현안에 대해 각계 전문가 집단인 국회의원들은 맥락을 생략하고 발언하는 경우가 다반사기 때문이다.

속기사는 빨리 받아치는 직업이라고 흔히 알려져 있지만 실은 정확하게 알아듣고 찾아보기 쉽게 기록으로 남기는 업무를 담당하고 있다.

말이 특별히 빠르거나 사투리를 쓰는 의원들의 말을 속기하기 어렵지 않느냐는 질문에도 "한 상임위원회를 맡아 소속 의원의 말을 계속 듣다 보면 처음에 잘 알아듣지 못했던 의원의 말도 결국은 들린다"고 프로다운 답변이 돌아왔다. 최 주무관은 "누가 더 정확히 듣느냐, 듣는 귀가 더 좋으냐가 관건"이라면서 "귀는 시험을 안 보는데 들어오고 나선 손보다 귀가 더 중요하다고 깨닫게 된다"며 웃었다.

특히 국회의 업무가 이전보다 전문화되고 회의도 많아지면서 비공개로 열리는 소위원회의 중요성이 훨씬 높아졌다. 실제 지난 제15대 국회에선 344쪽에 불과했던 소위원회 회의록이 제18대 국회에선 4만7078쪽으로 100배 이상 증가했다. 소위원회가 열리는 빈도와 진행 시간이 그만큼 증가한 셈이다.

언론에도 공개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소위원회의에서의 유일한 관찰자이자 기록자는 속기사들뿐이다. 상임위 회의 가운데 법안소위 회의는 전문가 중의 전문가들이 모여 진행하는 것으로, 법안소위 회의 기록은 속기사들이 가장 애를 먹는 작업 중 하나다.

최 주무관은 "소위원회에서는 정돈되지 않은 말이 오가고 의원들은 모두 전문가이기 때문에 주어를 생략하고 말한다"면서 "갑자기 튀어나오는 용어들이 그때 파악되지 않으면 속기 이후에도 정리하는 과정이 힘들기 때문에 담당 상임위 관련 현안을 항상 주시할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이처럼 속기사들은 5분, 10분, 15분 등 짧은 간격으로 교대하며 속기하는 그 순간보다는 정확한 '받아쓰기'를 위해 미리 공부하고 기록 후 정리하는 과정 등 보이지 않는 곳에서 더 바쁘게 일한다. 단 5분 속기를 하고 나와 전문 용어를 확인하는 데 2박 3일이 걸리는 경우도 있다. 예산정책처에서 발간되는 보고서와 연구결과 등 간행물을 꼼꼼히 살피는 것도 완벽한 속기를 위한 준비작업에 속한다.

국회 의사국 의정기록1과 이순영 과장은 "얼핏 보기에 국회 속기사는 기술적인 능력이 더 필요해 보이는 직업으로 보이지만 기술적인 능력보다는 지적 능력이 더욱 요구되는 직업"이라면서 "발언을 하는 사람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면 글로 풀어낼 수 없기 때문에 발언자와 동일한 지식과 자질을 갖춰야 한다"고 강조했다.

속기 후 조각조각 떨어져 있는 기록물을 하나로 묶고, 오타와 오류를 수정하는 것은 20년차 이상 베테랑 선배 속기사들의 몫이다. 본회의나 예산결산특별위원회 회의의 경우 빠른 시간 내에 취합과 검토가 끝나 회의 바로 다음날 임시회의록이 의원실로 배부돼야 한다. 이처럼 신속히 처리해야 하는 회의는 1인당 5분씩 시간이 배정돼 업무 속도를 높인다.

의원들의 발언이 분 단위로 정확히 나눠지지 않을 경우엔 발언을 놓치지 않기 위해 일정 부분 '겹치기' 업무를 하기도 한다. 기계처럼 나눌 수는 없고 앞뒤로 10초 정도 겹쳐서 기록되는 부분이 생기는 것. 이 부분을 이어 붙이는 것도 편집을 맡은 선배들의 업무다. 5분을 속기한 내용을 검토하는 데는 일반적으로 1시간 가량 소요된다. 이렇게 정리된 회의록은 전자회의록 형태로 만들어져 요즘은 누구에게나 인터넷상에서 공개된 자료로 제공되고 있다.

■회기 중엔 쉴 틈 없이…"칼퇴근은 남 얘기"

"가을에 정기국회와 국감이 동시에 진행되면 애인이랑 헤어지는 여직원들이 종종 있어요." 농담으로 넘겨 버릴 수 없는 이러한 고충은 '공무원=칼퇴근'이라는 공식이 전혀 통하지 않는 국회 속기사들의 애환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국회 회의가 진행되는 곳에는 항상 함께 해야 하는 속기사의 숙명은 국회 선진화법 도입 이전엔 연말마다 예산심의가 해를 넘겨 계속되는 관례 아닌 관례에 12월 24일과 31일을 모두 국회에서 맞게 했다.

지난해에는 예산 심의를 기한 내에 마치면서 연말을 가족과 보냈지만 그렇다고 국회선진화법이 마냥 고마운 것은 아니다. 일명 '날치기 방지법'인 선진화법 때문에 전처럼 최루탄을 맞을 수도 있는 극한 환경에서 작업하는 것은 아니더라도 대화와 타협 정신을 기본으로 하는 선진화법의 취지 탓에 절대적으로 회의 시간이 길어졌기 때문이다.

최 주무관은 "사실 전에는 회기와 비회기 구분이 명확해서 비회기 땐 분주한 느낌이 적었는데 요즘엔 전혀 그렇지 않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올해 들어서도 비회기 도중 열린 국무총리와 장관 인사청문회, 공무원연금개혁특별위원회의 등으로 회기 때와 다름없는 바쁜 날을 보냈다.

그래서 공무원은 대부분 '9 to 6'를 지키는 직업이라고 생각하는 일반의 인식이 서운할 때도 많다. 최 주무관은 "친구들도 당연히 '칼퇴(정시에 퇴근하는 것)' 하는 게 아니냐고 하지만 실상은 주말에도 남편 혼자 아이를 보는 일이 다반사"라고 말했다.

국회 속기사들은 일반 공무원과 똑같이 수당에 대한 규정을 적용받기 때문에 아무리 추가 업무 시간이 길어져도 하루 최대 4시간까지만 추가 업무 수당을 받을 수 있다. 그마저도 야근이 집중되는 9~12월 기간에는 예산 부족 등의 이유로 추가 수당을 제대로 받지 못하는 일이 발생하기도 한다. 야근보다 더한 고충은 시간이 정해진 회의가 아니다 보니 퇴근 시간을 예측할 수 없다는 것. 회의 비중을 보고 야근 인원을 정하는데 익일 회의록 발간을 요하는 중요 회의는 절반 이상의 속기사들이 남아서 대기하는 경우도 있다.

20여년 '빠르게 받아치는' 업무에 종사하면서 얻게 되는 직업병도 있다. 일반 사무직 종사자들도 흔히 겪지만 어깨나 손가락, 손목 관절에 대한 부담이 훨씬 큰 편이다. 또 속기한 원고를 자세히 보고 교정하는 과정에서 시력저하와 안구건조증 등은 덤으로 따라온다. 2년차 신입 손아영 주무관은 회의가 길어지니 '미용'을 포기하고 렌즈 대신 안경을 선택하게 되더라며 육체적 피로를 호소했다.

그렇다면 여타 공무원 직급체계와 똑같은 수준의 대우를 받으면서 훨씬 강한 업무 강도를 이겨내는 속기사들의 보람은 뭘까.

최 주무관은 "지금 하고 있는 회의가 몇백년 후에도 볼 수 있는 자료가 된다는 사명감이 있다"면서 "특히 활자로 정제된 자료는 의원뿐 아니라 학생, 교수 등의 연구자료로도 활용되고 있다"며 자부심을 나타냈다.

국회 속기사들은 회의가 끝난 뒤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 확인하고 싶다'고 연락이 오는 의원들의 전화가 오히려 반갑다고 했다.

요즘은 의원들이 회의 도중 "지금 이건 기록으로 남기기 위해 발언하는 것"이라고 '무언의 관찰자'인 속기사들을 수면 위로 끌어올려 줄 때면 책임감과 동시에 보람을 느끼기도 한다.

특히 국회의 입법활동이 다양해지면서 국회 속기사들의 중요성도 점차 높아지고 있다.


의사국 의정기록1과 이순영 과장은 "사회적 화두가 소통과 공감인데 국회 속기사는 과거의 기록인 역사와 소통한다는 점에서 책임감과 사명감을 가지고 일하고 있다"면서 "선진 의회에서는 회의 내용이 어떻게 기록되는지 다른 국가 의회의 속기사들과 교류하면서 우리의 속기 문화와 능력을 발전시켜 나가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wonder@fnnews.com 정상희 조지민 기자



Hot 포토

많이 본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