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 "누구나 결국 한줌의 재, 亡者 대하는 손길 다를 수 없어"
2015.06.24 17:57
수정 : 2015.06.24 22:05기사원문
언젠가 가게 될 곳, 화장장
분향실 블라인드가 내려오면 시신은 로내대차 실려 불속으로 망자와 유가족의 영원한 이별
슬픔 넘어 망자를 위한 임무
노무현 전 대통령·세월호 희생자 모두 이곳 수원연화장 거쳐가 시신 못찾은 천안함 장병은 머리카락·덮던 이불 태우기도
사람은 태어나 누구나 한 번은 세상과 이별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장사(葬事)시설은 누구나, 언젠가 이용하게 될 공익시설이자 필수적인 생활시설이다.
최근 들어 우리의 장례문화는 매장(埋葬)에서 화장(火葬)으로 급격하게 변했다. 저출산 등으로 묘지를 관리할 후손이 줄어든 데다 매장(무덤) 허가를 받기가 까다로운 것도 원인이다. 2013년을 기준으로 전국 화장률은 76.9%에 이른다. 국민 4명 가운데 3명이 화장을 선택한다는 얘기다.
경기 수원시시설관리공단이 운영하는 수원연화장은 국내에서 가장 잘 알려진 화장장 가운데 하나다.
노무현 전 대통령과 천안함 피격사건으로 희생된 장병(22명), 세월호 참사 희생자(208명) 등이 이곳을 거쳐 이승의 마지막 길을 떠났다.
【 수원(경기)=윤경현 기자】 수원연화장이 가장 바쁜 시기는 추모객이 집중되는 설과 추석이다. 다른 이들이 모두 명절을 즐기고 있을 때 수원연화장 임직원은 비상근무를 한다. 수원연화장의 최고책임자인 이재린 소장(54)은 "명절에는 차량만 하루 5000대, 방문객은 2만∼2만5000명이 몰려든다"며 "전 직원이 주차 계도에만 매달려도 저녁이면 파김치가 될 정도"라고 말했다.
■망인(亡人) 하늘길로 인도하는 사람들
지난 19일 오전 수원연화장 승화원의 8번 분향실은 온통 눈물바다였다. 작은 유리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유가족들이 고인과 고별식을 치르고 있었다. 곳곳에서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 5분 가까이 지나자 블라인드가 닫혔다. '고인을 다시 볼 수 없다'는 뜻이었다. 큰소리로 목놓아 우는 이도 있었고, 슬픔을 이기지 못해 맥이 풀린 나머지 자리에 털썩 주저앉는 이도 있었다.
그 시각 유리벽 반대편의 화장로에서는 마스크와 보호안경, 장갑을 착용한 작업기사들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지금부터가 제일 긴장되는 시간이다. 잡담은 일절 금지다. 보호안경 너머로 눈빛으로 대화를 주고받는다.
수원연화장은 총 9개(예비용 1개 포함) 화장로를 갖추고 있다. 한꺼번에 서너개 화장로가 동시에 돌아가기 때문에 몇 번이고 반복해서 확인해야 한다. 실제로 10여년 전 민간에서 장례식장을 운영할 때 매장 시신과 화장 시신이 뒤바뀐 적이 있단다.
시신은 8번 화장로로 옮겨졌다. 2009년 5월 노 전 대통령이 화장됐던 그 화장로다. 하지만 작업기사들에게 고인의 신분이나 지위는 전혀 고려사항이 아니다. 13년차인 황돈하 작업반장(55)은 "고인이 누구든 간에 마지막 가는 길이 편안하도록 한 분 한 분 정성스럽게 모실 뿐"이라며 "살아서 어떤 사람이었는지에 관계없이 화장을 하고 나면 한 줌의 재가 되는 것은 똑같다"고 했다. 유가족을 대신한 작업기사들의 손길이 조심스럽기 그지없다.
마지막으로 관을 올려놓는 로내대차의 길이는 대형이라고 해도 2m30㎝에 불과하다. 황 반장은 "한 번은 덩치가 엄청나게 큰 시신이 들어왔는데 관이 화로에 들어가질 않았다"며 "유가족에게 사정을 설명한 후 관을 뜯어서 내 손으로 직접 시신만 로내대차로 옮겼다"고 말했다.
잠시 후 고인의 이름이 적힌 손바닥 크기의 흰색 아크릴판이 화장로 옆에 내걸렸다. 지난해 초부터 화장로에서 일하고 있는 작업기사 김민성씨(34)가 "흰색은 유골을 곱게 빻은 분골로, 검은색은 유골 그대로 유족에게 전달된다는 의미"라고 설명해줬다.
사람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화장에는 20∼30분의 냉각시간을 포함해 보통 1시간30분∼2시간이 걸린다. 김씨는 "묘지를 개장해 미라 상태로 오는 시신은 습기가 많아 3시간이나 걸린 적도 있다"고 말했다. 1시간 넘게 화장이 진행 중인 3번 화장로에 가까이 다가서니 후끈한 열기가 느껴졌다. 온도계를 보니 700도를 넘었다. 혹시나 하고 걱정했던 냄새는 전혀 없었다.
수원연화장에서는 하루 30명 안팎의 망자가 작업기사들에 의해 하늘길로 인도된다. 1개 화장로를 4회가량 가동하는 셈이다. 김씨는 "윤달에는 묘지를 개장해서 오는 분들이 많다"면서 "최고로 많을 때는 50구의 시신을 처리한 적도 있다"고 설명했다.
3번 화장로의 불이 깜빡거렸다. 이제 로내대차를 꺼내 유골을 수습해도 된다는 신호다. 요즘 같은 무더운 날씨에는 유골을 수습하는 작업이 만만치 않다. 김씨는 "열기가 그대로 남아 쇠로 만든 빗자루를 이용해 유골을 쓸어담는데 불꽃이 튈 정도"라고 했다.
유골이 밖으로 나오자 황 반장이 먼저 커다란 자석을 꺼냈다. 생전에 수술 등으로 몸속에 남았을지도 모를 금속을 제거하기 위한 것이란다. 김씨는 그 옆에서 시커멓게 타버린 동전을 열심히 골라내고 있었다. 그는 "유족들이 저승길에 노잣돈하라며 넣어준 동전"이라며 "간혹 저금통을 통째로 쏟아붓는 이들도 있어 골라내느라 한참이나 애를 먹는다"고 말했다.
각종 이물질을 골라낸 두 사람은 가로세로 25㎝ 크기의 상자에 유골을 담기 시작했다. 어른 주먹 크기의 유골부터 가루까지 천차만별이다. 작은 조각 하나까지 빼놓지 않고 정성스럽게 쓸어담았다. 덩치가 큰 사람이나 작은 사람이나 할 것 없이 상자 안에 유골이 모두 담긴다는 것이 신기하게 생각됐다. 황 반장은 "이북이 고향인 분들은 고향의 흙을 함께 넣어달라고 요청하는 경우도 있다"고 했다.
유골 수습을 마친 로내대차에서는 여전히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뜨거운 열기가 아직 남았다는 얘기다. 이날 수원연화장에서는 아침 7시부터 오후 4시까지 총 25구의 시신이 화장됐다.
■슬픔 삼켜야 하는 표정관리가 제일 힘들어
'프로'라고 자부하는 이들이지만 '표정관리'는 여전히 어렵고 힘들다. 웃어도, 찡그려서도 안 된다. 일을 해야 하기 때문에 유족들의 슬픔에 동요돼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김씨는 "처음에는 눈물을 참기 위해 애꿎은 천장만 수차례 올려다보곤 했다"며 "지금은 익숙해져서 견딜 만하다"고 했다.
황 반장은 "10년 넘게 이 일을 해왔지만 지금도 어린아이들을 보면 눈물을 참기가 힘들다"고 했다. 그는 "아버지가 돌아가셨는지, 어머니가 돌아가셨는지도 모른 채 가족·친지들이 많이 모인 게 좋아서 마냥 웃으면서 뛰어다니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면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난다"고 말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사연을 물었다. 황 반장은 "유족이라고는 고등학생, 대학생으로 보이는 자매가 전부였던 적이 있다"며 "알고 보니 자매가 어렸을 적 아버지가 가출하는 바람에 고인이 돼서야 연락을 받고 장사를 치르는 안타까운 사연이었다"고 말했다. 곁에 있던 김씨가 "사고로 사망한 시신이 있었는데 시신 일부를 찾지 못해 화장을 두 차례에 걸쳐 한 적도 있다"고 덧붙였다.
2010년 4월 천안함 침몰 사건도 잊을 수 없다. 특히 시신을 찾지 못한 장병들을 화장할 때 가슴이 먹먹했단다. 김씨는 "시신이 없는 예닐곱 명의 장병은 당사자의 머리카락이나 손톱, 심지어는 덮고 자던 이불을 대신 태우기도 했다"며 "하염없이 우는 부모님들을 보면서 어떻게 가슴 아프지 않을 수가 있겠나"라고 반문했다.
지난해 세월호 참사는 이들에게도 큰 충격이었다. 당시 수원연화장에서는 경기 안산 단원고 학생을 비롯해 모두 208명이나 되는 희생자가 화장됐다. 두 달가량 비상근무를 해야 했다. 김씨는 "마치 '전쟁터'처럼 승화원이 매일매일 슬픔에 잠겼다"면서 "우리도 사람인지라 너무 힘들었다"고 소회했다.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를 우려해 화장로 작업기사는 물론 대다수 직원이 심리치료를 받을 정도였다.
일부 유족이 슬픔과 분노를 거칠게 쏟아내는 바람에 황 반장이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딸을 잃은 부모로 기억합니다. 화장로 입구까지 들어와서는 다짜고짜 우리 작업기사들의 뺨을 때리더라고요. 제가 죄를 지은 것은 아니지만 그냥 묵묵히 맞았습니다. 자식이 있는 입장에서 마음이 아팠습니다. 같은 부모로서 한 맺힌 그 마음이 충분히 이해가 되더라고요. 그 부모들이 저한테 나쁜 감정이 있어서 그런 게 아니잖아요."
매일 다른 이의 죽음과 슬픔을 마주하지만 이들은 "정신적 스트레스는 크게 받지 않는다"고 했다. 소위 '프로'라고 불리는 전문직업인이기 때문이다. 김씨는 "세밀하게 작업을 해야 하기 때문에 육체적으로도 힘들다"며 "일이 끝난 후에는 운동을 하면서 스트레스를 풀고 체력도 보강한다"고 설명했다.
화장장에서 일하는 것에 대한 주변의 편견이나 삐딱한 시선도 있었을 터다. 김씨는 "예전에는 조금은 하대를 받는 직업이었는지 몰라도 지금은 그런 시선들이 거의 없어졌다"고 확신했다. 그는 친구들이나 어느 누구에게도 '마지막 가시는 분을 모시는 일'이라는 자부심을 갖고 얘기한단다.
김씨는 "유족들이 유골함을 들고 가다 몇 번이고 돌아보면서 '고맙다' '감사하다'고 할 때 보람을 느낀다"며 "이 일은 우울한 '감정노동'이 아니라 나를 더욱 성숙하게 만드는 직업"이라고 말했다.
blue73@fn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