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⑤) "일본처럼 20~30년 한우물 팔 수 있는 연구문화 만들어야"

      2015.10.27 16:57   수정 : 2015.10.27 16:57기사원문
"기초과학에 대한 투자는 긴 호흡이 필요하지만 정책 당국에서는 이를 기다려주지 못하고 있다. 일본처럼 20~30년씩 한 우물을 깊게 팔 수 있는 연구 문화가 필요하다."

정갑윤 국회 부의장은 지난 26일 국회 본청 부의장실에서 가진 파이낸셜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즉각적인 성과를 내지 못하면 꾸준한 지원을 받을 수 없는 국내 과학정책의 구조적인 문제를 지적했다.

'미스터 이공계'로 불리는 그는 "연구 종사자들의 생활안정과 긍지를 높여주는 것이 우리 과학계 성패의 키"라며 이공계 종사자들의 처우 문제를 강조했다.

정 부의장은 최근 정부가 젊은 과학자를 선발해 지원하는 '넥스트 디케이드-100' 프로젝트에 대해 기대를 보였다.

울산과학기술대학교(UNIST)의 과학기술원 전환을 이끌어낸 그는 "과기원을 통한 기초과학 육성안에 대해 공감한다"며 "UNIST에 있는 이름 없는 9개의 다리에 노벨상 수상자들의 이름이 새겨질 것"이라고 기대했다.

특히 그는 지난 2001년 노벨 화학상을 수상한 바 있는 노요리 료지의 말을 빌려 과학자들이 자유롭게 연구할 수 있는 분위기가 만들어지기를 당부했다.

"29세란 젊은 나이에 연구를 시작할 수 있도록 해준 일본 연구환경에 감사한다.


한국 또한 젊은 과학자들이 독창적인 주제로 자유롭게 연구할 수 있는 분위기가 먼저 형성되면 노벨상 수상은 자연스레 따라오게 될 것이다."


―올해 일본 과학자 2명이 노벨상을 연거푸 수상했다. 과학계에서 노벨상 수상자 수로 따지면 21대 0이라는 자조 섞인 목소리도 나온다. 이는 노벨상 수상뿐 아니라 일본과 한국 과학계의 전반적인 분위기 차이 때문이라는 지적도 있다.

▲일본이 과학 분야의 노벨상 수상자를 본격적으로 배출한 시점은 2000년 이후다. 수상자 21명 가운데 2000년부터 올해까지 16명이 나왔다. 이들이 1980년 이후부터 꾸준히 업적을 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그 시기 일본은 버블 붕괴로 경제가 좋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정부에서 연구개발(R&D) 예산을 국내총생산(GDP)의 2% 이하로 줄이지 않는다는 원칙을 세웠다. 경제위기가 닥쳐도 이 원칙만은 고수했다. 이처럼 일본은 원칙을 가지고 멀리 내다볼 수 있는 뚝심을 가지고 있다. 이는 기다림의 미학이다. 이것이 지금의 성과를 내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을 것이다. 우리는 즉각적인 성과를 내지 못하면 꾸준한 지원을 받을 수 없는 구조적인 측면이 있다. 특히 기초과학은 긴 호흡이 필요한 학문이다. 하지만 정책 당국에서는 이를 기다려 주지 못하고 있다. 성과를 꾸준히 내야 하기 때문에 도전적이고 창의적인 연구보다는 안전한 과제만을 수행하는 연구문화가 자리 잡게 된 것이다. 우리나라는 일반적으로 연구를 시작하고 평가받는 데까지 대부분 3년 정도로 호흡이 짧다. 진득하게 연구하기도 쉽지 않은 연구풍토다. 중장기 연구라고 해도 3년마다 중간평가를 거쳐야 한다. 일본처럼 20~30년씩 한 우물을 깊게 팔 수 있는 연구문화가 자리 잡을 수 없는 것이다.

―특히 중요한 것은 이공계 기피 현상, 그중에서도 기초과학을 등한시하는 세태가 문제라는 비판도 크다. 이를 해소할 만한 방안이 있나.

▲본인은 지난 2003년 정기국회 대정부질문에서 당시 고건 총리를 대상으로 정부의 이공계 푸대접을 신랄하게 꼬집었던 적이 있었다. 이 일로 동료의원들로부터 '미스터 이공계'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1960~70년대 근대화 과정에서 이공계 출신들의 지식은 근대화의 초석이 됐다. 당시에는 이들도 좋은 대접을 받았다. 하지만 1997년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많은 연구원들이 대규모로 구조조정되자 이공계 기피현상이 시작됐다. 이후 지속된 이공계 기피현상은 기초과학 분야를 부실하게 만들었다. 이를 계기로 일본과의 격차도 훨씬 커졌을 것이다. 이 현상을 극복하기 위해 역대 정부에서 많은 노력을 했지만 뚜렷한 성과를 내지 못했다. 이공계 출신들의 처우개선이 지금보다 더 적극적으로 이뤄져야 한다. 이공계 출신 연구원들은 상당수가 비정규직 연구원이라는 불안정한 신분이다. 때문에 창의적 연구에 몰두하기가 어렵다. 이공계 박사의 비정규직 비율이 학생들의 이공계 진입 기피의 결정적 이유이기도 하다. 창의력이 뛰어난 연령대의 고급인력이 안정적인 직업, 연구환경을 가질 수 있도록 비정규직 문제를 시급히 해결해야 한다. 이공계 출신들의 고위공직자 비율은 많이 나아졌지만 그 비중은 아직도 작다. 정부의 인사정책에서 적극적인 고려가 필요하다.

―최근 박근혜정부는 '젊은 30대 과학자 1000명'을 육성하는 '넥스트 디케이드-100' 프로젝트를 추진한다. 이에 대한 전망은.

▲국내 기초과학 R&D 전략에 대한 검토가 필요하다는 과학계의 의견을 반영한 것이다. 정부 차원에서 20~30대 젊은 과학자 1000명을 뽑아 10년간 8000억원을 연구비로 지원하는 프로젝트다. 해외 석학과의 연계 연구를 적극 지원해 연구자 수준을 높이고 유행에 따르는 연구 대신 평생 한 분야에만 매진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하지만 정부의 노력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민감한 분야에 대해서는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고 무엇보다 그들을 바라보는 우리 사회의 인식 변화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박근혜정부는 과학과 정보통신기술을 앞세운 창조경제를 기치로 내걸고 있지만 내년 주요 R&D 예산은 오히려 축소됐다.

▲투자 측면에서 보면 우리나라는 국내총생산(GDP) 대비 R&D 비중은 4.15%로 세계 1위이다. 제한된 예산에서 결코 작은 수치는 아니다. 문제는 선택과 집중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예산 축소도 문제지만 전략과 예산운영방식도 개선이 필요하다. 한국의 R&D 체계는 국가 차원의 중장기적 R&D 전략이 미흡하고, R&D의 전략방향과 실제 투자계획 간 연계도 적절치 않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또 부처 중심의 사업구조를 벗어나 프로그램 중심의 사업구조로 예산 제도를 운용해야 한다는 의견도 나온다. 정부 예산이 한정된 상황에서 R&D에만 무한정 투자하기도 어렵다. 결국 예산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배분하고 보다 체계적이고 전략적으로 접근해야 한다고 본다. 그럼에도 R&D 예산의 축소는 우려스러운 측면이 있다. 예산 심사과정에서 조정될 여지도 있을 것이다.

―울산 지역 국회의원으로서 울산과학기술원 출범을 주도했다. 카이스트, 지스트, 디지스트에 이어 네 번째 과기원이다. 국내 과학계에서 UNIST의 과기원 전환이 어떤 의미를 갖나.

▲울산과기원은 과기원 전환법을 대표발의해 통과된 것이기에 더욱 애착이 간다. 대학체제에서 국가 대학원 전환은 첫 사례이기도 하다. UNIST는 그 전신인 울산과기대로 2009년 설립된 이후 각종 연구분야에서 괄목할만한 성장을 이뤄오고 있다. 특히 2차전지 분야 연구역량에서 미 매사추세츠공과대학(MIT), 스탠퍼드대와 함께 세계 3위권으로 꼽히고, 화학 및 신소재 분야는 글로벌 톱 20에 속한다는 것이 객관적인 평가다. 10년간 최대 1000억원을 지원하는 기초과학연구원(IBS)의 캠퍼스 연구단 3개를 유치했고, 특정연구기관육성법에 따른 연구기관으로 편입돼 정부의 R&D 지원을 보다 안정적으로 받을 수 있게 됐다. 과학기술 연구 분야에 있어서 명실상부 최고의 인재양성의 산실로 더 큰 성장을 하게 될 것이고 우리 과학기술 분야에 기초를 튼튼하게 할 큰 초석이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UNIST에는 9개의 무명의 다리가 있다. 머지않은 날에 이름 없는 9개 다리에 우리의 노벨상 수상자들 이름이 새겨질 것이라고 믿는다.

―과기원은 이 분야를 집중 육성하기 위한 특수목적 교육기관의 일환으로 볼 수 있다. 이 때문에 과기원에 대한 강력한 지원이 필요하다는 의견도 제기된다. 과기원을 통해 국내 기초과학을 집중 육성하는 방안이 있다면.

▲전적으로 동의한다. 과기원 육성과 지원을 위해 19대 의정활동 내내 많은 노력을 했다. 유니스트의 비전은 '인류의 삶에 공헌하는 세계적인 과학기술 선도 대학이 되자'이다. 이는 인류 복지에 공헌한 사람에게 수여한다는 노벨상의 이념과도 일맥상통한다. 과기원이 보다 효율적으로 운영될 수 있도록 자율권을 보장해주고 정부의 보다 적극적인 지원과 관심을 가진다면 울산과기원을 비롯해 여타 다른 과기원들도 지금보다 더 발전된 성과를 보여 줄 것이다.

―기초과학 육성은 노벨상 수상을 차치하더라도 산업계와 나라 발전에도 전반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이공계 출신으로 산업계에 몸담았던 경험에 비춰 기초과학과 산업의 시너지를 낼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기초과학의 수준이 한 나라의 국가경쟁력을 나타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기초과학 발전의 파급효과는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으로 엄청날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효과가 즉각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지난 30년간 산업화의 발전 원동력이 됐던 기술은 100년 전의 기초과학 연구 결과에 기반을 둔 기술에 의해 탄생한 것이다. 그러나 앞으로 50년 후, 100년 후의 기술은 현재의 기초과학 수준과 능력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기초과학에 대한 투자는 국가의 기간산업에 대한 투자와 다를 것이 없다.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휴대폰 기술의 50% 이상을 일본에 로열티를 주고 사용한다고 한다. 이것이 기초과학의 힘이다. 우리도 기초과학 육성에 근시안적 사고를 버려야 한다. 미국, 일본 등의 선진국들처럼 멀리 내다보고 투자.육성한다면 산업 발전에 있어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도움을 줄 것이다.
언제가 우리 기술이 일본 기업으로부터 많은 기술 로열티를 받는 모습을 상상하면 흐뭇한 웃음이 절로 지어진다.

―우리나라 과학계에서 노벨상은 언제 배출될 것이라 생각하나.

▲언제라고 장담할 수 없지만 유능한 젊은 과학자들에게 자유로운 연구환경을 제공해준다면 이른 시기에 수상자를 배출할 수 있을 것이라 확신한다.
넥스트 디케이드-100 프로젝트나 4년 전 정부가 기초과학 발전을 위해 '단군 이래 최대 기초과학 국책사업'으로 불리는 국제과학비즈니스벨트 사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IBS를 설립한 것도 이를 확신하는 근거다.

sane@fnnews.com 박세인 기자

■약력 △65세 △울산대 공업화학과 △울산대 산업관리공학 석사 △조선대 법학 명예박사 △16·17·18·19대 국회의원 △한나라당 울산시당위원장 △새누리당 중소기업활력화위원장 △국회 건설교통위원회 위원(현) △국회 부의장(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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