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문명화된 5개 인디언 부족 유럽문물.. 받아들여 기독교 개종
2015.12.31 17:09
수정 : 2015.12.31 17:09기사원문
체로키, 촉토, 치카소, 크리크(또는 머스코기) 그리고 세미뇰족을 흔히 '5개의 문명화된 인디언 부족'으로 부른다. 영국계 이민자들의 잣대로 볼 때 유럽 문명을 받아들여 백인들의 생활방식을 따르는 인디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 말하자면 이들은 시대 조류의 변화를 잘 파악해 유럽식 문물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생존해 나가기 어려울 것으로 판단한, 현실에 충실했던 인디언식 개방주의자인 셈이다.
크리크족 중 문명화를 거부하고 전통적 생활방식을 고수한 붉은 막대 지파는 백인들과 전쟁을 치르기도 했지만, 대체로 이들 5개 부족은 유럽 이민자들로부터 인간적 처우를 받았으며 백인과 결혼하는 사례도 흔했다. 부족민 대부분은 기독교 신자가 되었으며 일부 인디언은 대규모 농장을 운영하면서 흑인 노예까지 부리기도 했다. 그러나 1830년대에 들어와서는 백인들의 끝 모르는 탐욕에 희생돼 모두 고향 땅에서 쫓겨나 홍인종의 땅이라는 의미를 갖는 오클라호마로 강제이주를 당하고 만다.
이들 다섯 부족은 흙피라미드 문명의 마지막 시대인 미시시피 문명(기원후 800년 무렵부터 1500년대 유럽인이 침입할 때까지 번성)을 이루고 있었기 때문에 '미시시피 문명 5개 부족'으로 부르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이들이 살던 미국 동남부는 아열대성 기후에 강수량도 풍부해 농사 짓기에 매우 적합한 땅이었다. 따라서 북아메리카 대륙에서는 이 지역이 농업을 기반으로 한 정착생활을 가장 먼저 시작했다. 부족민의 상당수는 계획적으로 만들어진 도시에 살았으며, 추장에 의해 통치되고 높은 수준의 군사조직까지 보유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다섯 부족 중 체로키가 가장 넓은 땅과 많은 인구를 가지고 있었다. 이로쿼이 어족에 속하는 체로키의 현재 부족민 인구수는 약 30만명으로 이는 나바호에 이어 두번째로 많은 인구수다. 촉토족과 함께 치카소, 크리크, 세미뇰 족은 모두 머스코기언 어족에 속한다. 미국이 남과 북으로 갈라져 내전을 치르는 동안 다섯 개 부족은 서로 다른 입장을 취했다. 촉토와 치카소는 적극적으로 남군을 지지한 반면 크리크와 세미뇰은 북군 편에 섰다. 체로키는 부족 내에서도 둘로 나뉘어 다수가 남군을 위해 싸웠으나 소수는 북군 편에 서서 싸웠다.
이들 다섯 부족민은 미시시피강의 서쪽으로 쫓겨가야 하는 불운을 당했지만, 체로키족 일부는 스모키산 깊숙이 도피해 화를 면하기도 했고, 세미뇰족 일부는 끝까지 저항해 백인들의 강제이주정책 포기를 얻어내기도 했다. 특히 세미뇰 인디언 중 약 500명은 미군의 집요한 공격을 성공적으로 막아내 오클라호마로 강제추방을 피할 수 있었는데 그들은 스스로를 '정복되지 않은 사람들'이라고 불렀다. 현재 그들의 후손이 플로리다의 에버글레이드 호수 주변에서 상당한 관광수익을 올리면서 비교적 윤택한 생활을 영위하고 있다.
오늘날 노스캐롤라이나주에 있는 체로키 인디언보호구역에는 오코날루프티 인디언 민속마을이 만들어져 있다. 1750년 무렵 체로키 인디언들이 유럽 문명을 받아들이기 시작하던 시기의 생활상을 기본 테마로 건설됐는데 이곳에서 옛 주거시설을 비롯해 무기와 민속공예품 등의 제작 과정을 직접 볼 수 있다. 그들의 문명 수준은 유라시아대륙에서 가져온 석기시대 문명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에 어쩌면 이곳 민속마을에서 우리 민족의 고대문명 원형을 만날 수도 있을 것이다. 체로키라는 말은 오늘날 경비행기와 지프차의 브랜드로 쓰여 비교적 친숙한 이름이 되기도 했다.
'레이더스'라는 이름을 가진 록밴드는 1971년에 체로키 인디언의 비극적 운명을 노래하는 '인디언 보호구역(Indian Reservation)'을 발표해 큰 히트를 했는데, 그해 7월 24일에는 빌보드 차트 1위에까지 올랐다. 슬픈 사연으로 가득찬 가사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그들은 체로키 땅 전부를 가져갔네
우리를 이 보호구역에 집어넣고
우리의 생활방식, 손도끼
그리고 활과 칼마저 가져가 버렸네
우리 고유의 말도 빼앗고
우리 아이들에게 영어를 가르쳤네
그리고 우리가 손으로 꿴 구슬들은
지금은 일본에서 만들어내고 있다네
체로키 사람들, 체로키 부족
자랑스럽게 살고 자랑스럽게 죽네
그들은 인디언 나라의 전부를 가져갔네
우리를 이 보호구역에 가둬놓고
내가 셔츠와 타이를 걸치긴 하지만
나는 아직도 가슴 깊은 곳에선 인디언이라네
체로키 사람들, 체로키 부족
자랑스럽게 살고 자랑스럽게 죽네
그러나 아마도 언젠가 그들이 깨닫게 되면
체로키 나라는 다시 살아나리라
다시 살아나리라
다시 돌아오리라
■세콰이야
5개 부족 중 체로키족이 백인의 생활방식에 가장 가까이 가 있었는데 여기에는 한 걸출한 인재의 역할이 컸다. 세콰이야라는 선각자는 체로키 말을 기록할 수 있는 체로키 문자를 고안했다. 체로키 네이션은 1825년에 이 문자체계를 체로키 공식문자로 채택했다. 체로키 네이션은 1828년부터 우스터 선교사와 힘을 합쳐 체로키 네이션의 수도였던 에코타에서 '체로키 피닉스'라는 신문을 발행하기 시작했다. 이 신문은 체로키 문자와 영어를 함께 사용했다.
조지아주 정부는 우스터가 조지아 주법을 어기고 불법적으로 체로키족 영토로 들어와서 인디언을 돕고 있다고 판단해 그를 체포하여 투옥했다. 체로키족이 강제추방으로 어려웠던 시기에는 발행이 중단된 적이 있지만 이 신문은 오늘날까지도 인터넷신문 발행으로 그 맥을 이어가고 있다. 미국 정부가 1980년 말부터 20년간 수행한 '위대한 미국인 기념우표 발행사업'의 일환으로 세콰이야, 레드 클라우드, 크레이지 호스, 시팅 불 등 네 명의 인디언을 선정해 기념우표를 발행하기도 했다.
김철 전 한양대 겸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