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3년만에 짓밟힌 코리안드림의 서막
2016.01.10 17:11
수정 : 2016.01.10 17:11기사원문
#. 오는 15일 1심 법원에서 살인미수 혐의로 기소된 남편의 형(刑)이 선고된다. 남편은 변호사를 통해 합의를 요구하지만 아내 A씨는 마음을 닫았다. 형사재판 후에는 이혼소송도 진행할 생각이다. 중국 이주민인 A씨는 한국인 남편으로부터 평생 떨어져 살기를 바란다.
"승객 여러분 안전벨트를 착용해주시기 바랍니다. 잠시 후 비행기가 인천공항에 착륙하겠습니다."
옌지 차오양촨 공항(중국 지린성 연변 조선족 자치주 연길시에 있는 공항)을 떠난 지 2시간여가 지났다. A씨는 기내 방송을 듣고 눈을 질끈 감았다. '정말 한국에 왔구나….'
중국 지린성에서 태어난 A씨는 어릴적부터 한국말에 친숙했다. 한국인 아버지와 어머니는 6.25 전쟁때 중국으로 건너와 결혼했다. 아버지는 과수원에서 사과와 배를 재배해 자식들의 교육비와 생활비를 마련했다.
지린성에서 정규 교육을 마친 A씨는 스무 살이 되던 1994년, 중국 칭다오에 위치한 한국계 섬유회사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상하이에서 한국 소매상들을 대상으로 가이드를 하며 통역분야에 전문성을 높였다.
서른살이 되던 해 A씨가 한국행을 결심한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한국에서 살고 있는 외가쪽 친척들이 A씨와 어머니가 한국에 오기를 원했다. A씨는 자신의 능력을 믿었고 중국보다 경제수준이 나은 곳에서 새 도전을 해보고 싶었다.
2004년 11월, 그렇게 A씨는 자신의 뿌리가 있는 나라로 향하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중국보다 한국에서 벌이가 나을 거야. 돈을 차근차근 모아보자.'
■고된 한국의 첫 일자리
이주여성이라는 신분으로 한국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하기는 녹록지 않았다. A씨는 한국에 들어온 지 한달 후 첫 일자리를 구했다. 서울 구로동쪽 직업소개소를 전전한 결과다.
A씨의 첫 한국 직업은 경기 하남시에 있는 고급 한정식집 서빙이었다. 3층 건물인 식당에서 숙식도 가능하다는 사장의 말에 A씨는 당장 일을 시작했다. A씨는 하루 빨리 한국에서 자리를 잡기 위해 스스로를 다잡았다.
밤 10시 일이 끝나면 1층 홀에서 테이블을 한쪽으로 치워 누울 자리를 마련했다. 다음날 아침 6시 일어나 일을 준비했다. 월급은 적었지만 손님들의 팁이 괜찮았다.
한식당에서 10개월 정도를 보내고 친척들이 있는 서울쪽에서 일을 찾기로 마음을 먹었다. 어느 정도 돈이 모여 혼자 거주할 곳도 찾고 싶었다.
청량리쪽에 거처를 마련하고 새로운 일자리를 찾던 A씨는 소개팅 제안을 받았다. 한국에 온지 1년여가 지나 타국 생활에 어느 정도 적응을 하고 있던 A씨도 싫지만은 않았다.
버스기사를 하는 30대 후반의 남자고 형편이 넉넉하지는 않지만 성실하다는 얘기를 들었다. 몇달 전 한국에 들어온 어머니도 한국에서 남자를 만나 결혼하기를 원하던 터였다.
■수치스러운 사건이 계기로
2006년 4월 청량리역 근처에서 남자와 첫 만남이 이뤄졌다. 남자는 A씨에게 적극적이었다. 매일 전화로 안부를 물었다. 거절당해도 다음에 만날 날짜를 잡으려고 노력했다. 몇 달간 남자와 교제를 망설이던 A씨는 한 사건을 계기로 마음을 열었다.
청량리쪽에서 새로 구한 일자리는 호프집 서빙이었다. 호프집에는 A씨와 같이 중국 국적의 여직원 3명이 더 있었다. A씨가 아르바이트를 시작한지 한달쯤 지난 어느날 60대 사장이 퇴근하던 A씨를 불러 앉혔다.
"나랑 애인하자. 여기서 일하는 직원들 다 그렇게 지낸다. 용돈도 챙겨줄 거다."
A씨는 당황했지만 침착하려 애썼다. 떨리는 입술에 힘을 주고 아무말 없이 호프집을 빠져 나왔다. 그 길로 A씨는 처음으로 남자를 먼저 찾았다.
"한국에 너무 실망했어요. 아무리 이주여성 혼자 살고 있다 해도 사람을 이렇게 쉽게 대하는 게 말이나 됩니까. 이런 대우를 받고 일해야 한다는 게 수치스럽고 힘들어요"
A씨의 말을 조용히 듣고 있던 남자가 입을 열었다. "매달 생활비를 줄테니 일 그만하지. 그리고 우리 같이 사는 것은 어떤가"
■사소한 말다툼으로 시작된 폭력
2006년 11월 A씨는 남자와 결혼했다. 넉넉한 형편은 아니었지만 신혼은 행복했고 아이도 생겼다.
하지만 낮선 땅에서 찾은 행복감은 오래가지 못했다.
2008년 8월 남편이 폭력성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장모의 병문안을 놓고 시작된 말다툼 끝에 남편이 A씨의 목을 조른 것이다. 이후 남편의 행동이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심지어 A씨가 먹는 반찬에 독극물을 몰래 타는 엽기적인 행각도 벌였다. A씨는 생명의 위협 속에서 아이들을 생각하며 버텼다. 한국 땅을 밟은 지 3년여 만에 A씨의 부푼 꿈은 그렇게 무너져 갔다.
현재 A씨는 남편의 형이 최대한 무겁게 나오기를 바란다. 딸과 아들을 홀로 키우는 A씨는 현재 거주하는 곳에서 이사를 가기 위해 악착같이 돈을 모으며 소송을 진행 중이다. A씨는 언젠가 출소할 남편이 다시 눈앞에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가장 두렵다.
relee@fnnews.com 이승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