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세계 최초 16좌 등정 산악인 엄홍길 "22년간 16좌 등정.. 인생의 17좌 목표 향해 또 오릅니다"

      2016.02.14 18:28   수정 : 2016.02.14 20:41기사원문

인터뷰 일정을 잡기까지만 한 달이 넘게 걸렸다. 그 사이 서너 번 약속 날짜와 시간이 바뀌었다. 엄홍길 대장과 일대일로 만나는 일은 그야말로 하늘의 별 따기였다. 그는 바빠도 너무 바쁘다. 원래도 1년 365일 중 단 하루를 집에서 쉬지 않는 그이지만 '인생 17좌' 도전에 박차를 가하고 있어서다.
최근 그의 실화를 다룬 영화 '히말라야'가 흥행하면서 세간의 관심이 들끓었고 인터뷰나 방송 출연 요청이 쇄도했지만 모두 뒷전이었던 이유다. 정치권에서도 러브콜이 왔다. 최근 비례대표를 제안한 새누리당에 그는 "정치할 때가 아니다"라며 딱 잘랐다.

"주변에서 저를 가만 놔두지를 않네요. 하하. 인터뷰도 웬만하면 잘 안 해요. 다 할 수 없으니까…." 지난달 28일 서울 장충동 엄홍길휴먼재단 사무실에서 만난 그는 짐짓 미안한 기색을 띠며 웃어 보였다.

빛나는 미소였다. 그러고보니 산 타는 사람 맞나 싶을 만큼 피부도 하얗고 깨끗했다. 새카만 얼굴로 에베레스트 정상에서 태극기를 흔들던 그 사람이 아니었다. "나는 생전 스킨, 로션을 안 발라요. 현지에 가서 선크림을 발라 본 적도 없어요. 산을 열심히 다니면 좋은 기운을 받거든. 타든 트든 얼든 신경 안 써요. 그냥 다 순응하고 적응하는 거예요."

엄홍길은 세계 최초 히말라야 8000m 고봉 16좌 완등의 대기록을 세운 산악인이다. 지난 2007년 네팔 로체샤르(8382m)를 마지막으로 히말라야를 졸업했다. 부상의 여파로 움직이지 않는 발목을 이끌고서였다. 더 이상의 목숨 건 도전은 없다. "다 이루었으니까요. 애초에 갈망하던 목표가 16좌였으니…. 신이 나에게 허락해 준 한계점이죠. 정도를 알고 내려놓을 줄 알아야 해요. 넘어서면 탈이 나요. 22년간 16좌에 오른 세월을 생각하면 살아있다는 것부터 있을 수 없는 일이에요. 나는 얼음 속에 잠들어 있어야 할 사람이에요. 제2의 인생을 살고있는 거지."

그렇다고 인생의 도전을 멈춘 것은 아니다. "산악인으로서 히말라야 16좌 완등의 꿈을 이뤘지만 인간 엄홍길의 삶은 끝난 게 아니잖아요. 생을 마감하는 순간까지 도전의 연속이라고 생각해요. 꿈이 없고 희망도 없도 도전도 하지 않는다면 살아있는 게 아니죠. 저는 제 인생의 17좌가 있어요."

―'인생 17좌'가 무엇인가.

▲요즘 가장 집중하고 있는 일이다. 크게 두 가지다. 방황하는 청소년들과 함께 정기적으로 산에 오르며 꿈과 도전의식을 심어주는 일, 히말라야 16좌에 오른만큼 현지에 16개의 학교를 짓는 일이다. 2008년에 엄홍길휴먼재단을 설립해 교육, 의료 봉사에 집중하고 있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진행 중인가.

▲매달 두 번째 주 토요일 서울 강북구청 내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청소년 희망원정대'를 운영하고 있다. 학교장의 추천을 받은 '문제아' '모범생'을 한데 모아서 근교 산에 오른다. 여름과 겨울에 캠프도 간다. 여름엔 군부대 체험, 땅굴 견학도 하고 겨울에는 높은 산을 오른다. 지난해 12월에 태백산 등정으로 4기 활동이 마무리됐다. 이 가운데 모범 학생 남녀 각 1명씩 뽑아서 히말라야 등반 체험과 현지 봉사활동 기회도 준다. 히말라야 현지 학교는 지난해 11월에 10번째 학교를 완공했다. 오는 22일 네팔 건지 마을에 열한번째 학교 준공식이 열리고, 현재 열세번째 학교가 착공에 들어갔다.

―왜 이런 일을 하는가.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다. 16좌에 오르면서 항상 '살아서 내려가게만 해주시면 제가 받은 은혜를 베풀며 살겠다. 남을 위해 봉사하는 삶을 살겠다. 내가 받은 것에 비하면 티끌만큼도 안되겠지만 그렇게 살겠다'고 간절히 기도했었다. 그 약속을 지키라고 신께서 나를 살리신 것이다. 죽을 수도 있다는 걸 알고 하는 도전이기에 더 고통스럽고 두려운 16좌였다. 38번의 도전 가운데 20번을 완등했지만 18번의 실패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 과정에서 후배 대원 6명과 안내자 역할을 하는 현지 셰르파 4명을 떠나보내야 했다. 자연스럽게 영화 '히말라야' 얘기가 나왔다. '히말라야'는 지난 2005년 에베레스트에서 하산 중 생을 마감한 후배 대원 박무택의 시신을 찾기 위해 엄홍길 대장이 '휴먼원정대'를 꾸려 등반에 나선 실화를 바탕으로 한다. 기록도 명예도 보상도 없이 숨진 대원의 시신의 수습을 목적으로 한 등반은 전 세계적으로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영화에서 배우 황정민이 엄 대장을 연기했다. 엄 대장은 이 영화를 모두 여섯 번 봤고 볼 때마다 울었다고 했다.

―당시 생각이 많이 났겠다.

▲영화가 실제와 100% 같을 순 없지만 아주 생생하게 그려져서 놀랐다. 사실 평소에도 혼자 있을 때 늘 생각이 난다. 아직도 너무 뚜렷하게 뇌리에 박혀 있다.

―황정민이 연기한 엄 대장과 실제 엄 대장은 얼마나 닮았나.

▲평상시와 산에서의 모습이 많이 다른 것은 실제 나와 비슷하다. 산에서는 내가 안전을 책임져야 하는 대장이다. 대원들의 생사가 나에게 달려있으니 평소보다 굉장히 날카롭고 냉철해질 수밖에 없다. 강해져야 하고 희생정신도 있어야 한다.

―극한의 결단을 내려야 하는 상황도 많았을 것 같다.

▲정상을 코앞에 두고 발길을 돌린 적도 여러번 있었다. 눈앞에서 동료를 잃었을 때의 심정은 말로 표현할 수 없다. 더 치밀하게 대비하지 못했다는 후회가 남기도 하지만 신이 아닌 이상 갑작스런 사고를 예견할 수도 없다. 일반인들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들이 많다.

엄 대장은 이 대목에서 말을 줄였다. 영화 개봉에 앞서 만난 황정민의 말이 떠올랐다. "영화 준비하면서 엄 대장님과 술 자리도 여러번 했거든요. 속얘기를 듣고 싶었는데 끝까지 안하시더라고요. 전쟁을 겪은 어르신들이 처참했다고만 하시지 자세한 얘기는 안하시는 것처럼요."

생사고락을 함께하며 맺어진 인연의 농도는 속세의 그것과 차원이 달랐다. 그는 "죽어서도 이어질 인연이다. 떠난 이들을 대신해 재단을 통해 유가족들에게 경제적인 지원을 계속하고 있다. 숨진 현지 셰르파 자녀들 학자금도 책임진다. 살아남은 내가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해야 할 일이 참 많다"는 그가 요즘 가장 집중하는 것은 청소년 교육 사업이다. 네팔을 '제2의 고향'처럼 다니다보니 그 나라의 환경과 사람들에게 자연스럽게 눈이 갔다. "전세계에서 거의 가장 최빈국이라고 할수 있는 국가예요. 그 열악하고 척박한 환경에서 자란 아이들은 꿈도 없이 희망도 없이 가난을 물려받으며 살고 있어요. 우리나라도 전쟁 이후 폐허가 됐지만 60여년만에 초고속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 뭡니까. 바로 교육의 힘이에요. "

―산이 청소년들에게 어떤 영향을 준다고 생각하나.

▲산에 다니면 성격부터 바뀐다. 요즘 청소년들이 개인주의적이고 상대방에 대한 배려심이 부족한 경향이 있다. 공동체 의식의 결여다. 산행은 경쟁이 아니기 때문에 서로 끌어주고 밀어주고 하면서 동료애, 희생정신을 배운다. 친화력도 생긴다. 도시에서는 관계를 맺는 게 쉽지가 않은데 산에서는 스스럼이 없다. 친구도 금방 사귀게 되고 성격도 활발해진다. 자신감과 인내심도 커진다. 고통을 참고 정상에 올라 섰을 때 성취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힘들다고 주저앉으면 안된다는 교훈을 얻는 것이다.

―실제로 변화하는 모습을 본 사례가 있나.

▲뚜렷한 목표가 생기거나 공부를 열심히 하게 된 학생들이 많다. '싸움짱'이던 아이가 공부를 시작한 경우도 있고, 130등 하다가 46등으로 올라간 아이도 있었다. 부모님들도 간증을 한다. 집에서 말 한마디 안 하던 아이가 이젠 대화가 된다고.

누구보다 산에서 일평생을 살아온 엄 대장 스스로가 증인이다. 경기도 의정부 원도봉산 중턱에서 등산객을 상대로 식당과 숙박업을 하시던 부모님 덕분에 세 살 때부터 산이 삶의 터전이자 놀이 공간이었다. 그는 "처음부터 산이 좋았던 건 아니지만 산이라는 존재를 자각하고 나서부터 그 세계에 확 빨려들어갔다"고 했다. 엄 대장이 고2 때 한국인 최초로 에베레스트 등정에 성공한 고상돈씨의 소식은 결정타였다. 고등학교 졸업과 동시에 아예 입산을 결심하고 한라부터 설악까지 온 산을 누볐다. 산은 그에게 인생 최고의 정신적, 육체적 스승이었다. "교육을 통해서 지식을 터득하고 지혜를 터득하고 삶을 살아가는 방법을 깨닫잖아요. 그보다 더 큰 깨달음, 감정, 감동을 안겨준 것이 산이에요. 위대한 스승이죠."

―산에서 배운 것 중 요즘 젊은이들에게 가장 전해주고 싶은 것이 있다면.

▲어차피 가야할 길이라면 부정적인 생각을 버리고 죽기살기로 도전해보라고 말하고 싶다.

―흙수저, 금수저 얘기가 나온다. 노력만으로 되는 세상이 아니라고들 한다.

▲그러면 낮은 산부터 천천히 도전하면 된다. 500m도 못 올라가 본 사람이 히말라야를 어찌 오르겠는가. 실패해도 괜찮다. 나도 많이 실패해봤다. 빨리 인정하고 보완해서 다시 도전하면 된다. 다 똑같이 힘들다면 긍정적으로 마음을 바꾸고 한 번이라도 더 도전하는 것이 유리하다. 내 좌우명이 자승최강(自勝最强)이다. 자신을 이겨내는 것이 가장 강한 것이란 뜻이다. 부모도 형제도 내가 올라야 할 산을 대신 올라가 줄 수 없다.

"산에 왜 오르는가?" 그가 산악인으로서 가장 많이 받는다는 질문을 마지막으로 던졌다. "처음에는 그저 도전의 대상이었어요. 그런데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내 의욕과 자신감만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걸 알게 됐어요. 인간의 영역을 벗어나는 것이구나. 자만심을 버려야겠다. 산의 순리에 따라가야겠다.
이제는 산에 오르는 이유가, 내가 산이고 산이 나이기 때문이에요. 산이 있음으로 내가 존재하고 산은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주죠. 그걸 깨달았기 때문에 산에 올라요."

며칠 뒤 엄 대장의 권유로 북한산 등반을 함께했다. "유비무환"이라며 여벌 옷, 음식, 물 등을 꽉꽉 채워 10㎏이 넘는 그의 배낭엔 몽골 사람들이 귀한 손님에게 준다는 행운의 매듭이 양쪽으로 하얗게 매달려 있었다.
움직이지 않는 발목 때문에 까치발로 걷는 걸음은 사뿐사뿐 그렇게 가벼울 수가 없었다. 멀리서 바라보노라니, 언뜻 백발 신선이 스쳐가는 듯했다면 너무 과한 표현일까.

dalee@fnnews.com 이다해 기자엄홍길 대장△56세 △경남 고성 △한국외국어대 중국어과 △한국외국어대 대학원 체육교육학 석사 △1988년 네팔 에베레스트 등정 △1989년 체육훈장 거상장 △1993년 중국 초오유 등정 △1995년 네팔 마칼루, 파키스탄 브로드피크, 네팔 로체 등정 △1996년 네팔 다울라기리, 마나슬루 등정, 체육훈장 맹호장 △1997년 파키스탄 가셔브룸1·2봉 등정 △1999년 네팔 안나푸르나, 파키스탄 낭가파르밧 등정 △2000년 네팔 칸첸중가, 파키스탄 K2 등정 △2001년 중국 시샤팡마 등정으로 히말라야 14좌 완등, 대한민국 산악대상, 체육훈장 청룡장 △2004년 네팔 얄룽캉 15좌 완등 △2005년 에베레스트 휴먼원정대 등반대장 △상명대 자유전공학부 석좌교수 △2007년 네팔 로체샤르 등정으로 세계 최초 히말라야 8000m 16좌 완등 △엄홍길휴먼재단 상임이사(현) △밀레 기술고문 및 상무이사, 대한산악연맹 자문위원(현) △2009년 유네스코 한국위원회 선정 올해의 인물 △2012년 대한산악연맹을 빛낸 50인 △대한민국 창조경영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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