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의 재발견, 독립운동의 성지 '임청각'을 가다

      2016.06.09 16:44   수정 : 2016.06.09 22:40기사원문

안동엔 하회마을만 있는 게 아니었다. 선비의 고장, 이곳엔 독립운동가들이 유독 많았다. '나라를 되찾지 못하면 가문도 의미가 없다'며 아흔아홉칸 가택을 팔고 만주로 떠났던 이상룡 선생의 생가 '임청각'이 이곳에 있다. 그의 아들 준형도 일제의 끈질긴 고문을 받자 '일제 치하에서 하루를 사는 건, 하루의 치욕을 보탤 뿐'이라며 자결했다. 6월 호국·보훈의 달, 뜻깊은 여행을 준비한다면 경북 안동을 추천한다.
달빛 야경이 멋진 월영교와 안동 별미 헛제삿밥과 안동찜닭도 빠질 수 없는 여행의 즐거움이다.


【 안동(경북)=조용철 기자】 6월은 호국.보훈의 달이다. 특히 경북 안동의 선비들에게 독립운동은 의(義)를 행하는 유교정신의 실천이었다. 이곳에 독립운동 유공자가 유독 많은 이유다. 아버지와 아들, 며느리, 손자까지 대를 이어 독립운동에 헌신한 집안도 있고 가산을 정리한 뒤 만주로 망명해 독립군 양성에 이바지한 독립유공자도 있다.

경북 안동 시내에서 34번 국도를 타고 영덕 방면으로 가다 보면 법흥교를 건너기 직전 철길에 가린 큰 고가(古家)가 눈에 들어온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지낸 석주 이상룡(1858~1932)의 생가로 잘 알려진 임청각(臨淸閣·보물 182호)이다. 임청각은 이상룡 선생을 비롯해 독립운동 유공자 9명이 태어난 조선 중기의 고택으로, 최근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전 대표가 전격 방문해 눈길을 끌기도 했다.

'맑은 시냇가에서 시를 짓는다(臨淸流而賦詩)'는 도연명의 '귀거래사' 싯구를 빌려 지은 임청각은 조선시대 민간가옥 중 가장 큰 규모의 양반가 주택이다. 사당과 별장형 정자인 군자정, 본채인 안채, 중채, 사랑채, 행랑채가 영남산과 낙동강의 아름다운 자연과 조화롭게 배치돼 있다. 이상룡 선생이 호연지기를 키웠던 군자정은 건물 둘레에 쪽마루를 돌려서 난간을 세웠고 출입은 두 군데에 마련된 돌층계를 이용하게 돼 있는 것이 특징이다.


안채 튼방 앞에는 여러 명의 정승이 난다는 속설이 전해지는 우물방이 있다. 우물방은 진음수가 나는 용천이 바로 방 밑에서 솟는다고 해서 불리는 이름이다. 실제로 임청각의 외손들 중에서 여러 명의 정승이 나왔고 이상룡 선생을 비롯해 임청각 출신 9명의 독립유공자 모두 이 방에서 출생했다고 한다.

일제 강점기 중앙선 철도 부설로 99칸 건물 중 행랑채와 부속건물이 철거돼 현재는 50여칸만 남아 있다. 문화재청이 지난 1940년 중앙선 개통 당시 행랑채 등 일부가 강제 철거됐기 때문에 오는 2020년까지 우회철도를 개설한 뒤 훼손된 전각을 복원하겠다는 계획을 밝혔지만 소유권 등기 이전 등 여러 문제가 남아 있어 향후 사업 추진이 쉽지 않을 전망이다.

고성 이씨 석주 가문은 3대동안 이상룡 선생을 비롯한 동생 이상동, 이봉희, 아들 이준형, 조카 이형국, 이운형, 이광민, 손자 이병화, 당숙 이승화까지 모두 9명의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집안으로 손꼽힌다. '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한다'는 속설이 있는데 이 집안은 3대가 줄줄이 독립운동을 했으니 그들이 겪었을 고생은 짐작할 수도 없을 정도다.

구한말 퇴계학통의 유학자였던 이상룡 선생은 고성 이씨 17대 종손으로 안동시 법흥리 안동댐 진입로에 위치한 임청각의 소유주였다. 그는 나라가 일본에 빼앗기자 99칸의 임청각과 전답을 모두 팔고 1911년 1월, 전 가족과 함께 만주로 망명길에 올랐다.

이상룡 선생은 만주로 떠나면서 "나라를 되찾지 못하면 가문도 의미가 없다"고 조상의 신주를 땅에 파묻고 떠나 현재 사당에는 봉인된 신위가 없다. 망명한 뒤 이상룡 선생은 이회영 선생과 함께 신흥무관학교의 전신인 신흥학교를 건립했으며 항일독립운동단체 경학사를 만들기도 했다. 이상룡 선생은 이후 한족회회장, 서로군정서 독판,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 등을 역임했다.

이상룡 선생은 "나라를 찾기 전에는 내 유골을 고국으로 가져가지 말라"는 유언을 남긴 채 1932년 만주에서 생을 마쳤다. 이상룡 선생의 유고를 안고 귀국한 아들 이준형은 10여년간 일제의 끈질긴 고문.협박과 함께 변절의 요구를 받자 1942년 이상룡 선생의 문집인 '석주유고(石洲遺稿)' 정리를 마치고 "일제 치하에서 하루를 더 사는 것은 하루의 치욕을 더 보탤 뿐"이라는 유서를 아들 병화에게 남기고 자결했다. 이상룡 선생의 유해는 광복된지 45년 만인 1990년 중국 헤이룽장성에서 봉환돼 대전 국립묘지에 안장됐다가 1996년 서울 동작동 현충원 내 임정묘역으로 옮겨졌다.

석주 가문에는 재물보다 정신을 중시하는 가풍이 이어지면서 선조들의 숨결이 묻어 있는 유품과 서적 문집 등이 유난히 많다. 후손들은 이를 고려대 중앙도서관 '석주문고'에 기증했다. 임청각의 서적들은 모두 395종 1309책에 이른다. 이상룡 선생의 증손자 이범증씨는 "독립운동가 후손의 삶이라는 것이 평탄하진 않았지만 항상 자랑스럽다"며 "개인주의가 판치는 세대인 만큼 학생들이 독립운동가의 정신을 본받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임청각 인근에는 법흥동 고성 이씨 탑동파 종택과 국보 16호인 안동 법흥사지 칠층전탑이 있어 둘러볼 수 있다. 이 탑은 국내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전탑(벽돌탑)으로 일대가 법흥동인 점으로 미뤄 8세기 통일신라시대에 처음 건립됐다는 법흥사가 있었던 것으로 추측되지만 전탑 이외의 유물은 현재 남아 있지 않다. 다만 전탑 곳곳에 잡초들이 제거되지 않아 관리 상태가 좋지 않다는 아쉬움이 남았다.




임청각 인근 안동댐 근처에선 월영교의 야경과 함께 안동의 별미인 헛제사밥, 안동찜닭 등도 맛볼 수 있다. 임청각에서 상주 방면으로 20분 가량 가다보면 유네스코 세계유산인 하회마을이 있다.
이곳엔 퇴계 이황의 제자이자 '징비록'의 저자인 서애 류성룡이 평소에 '나라에 충성하고 부모에 효도하라'는 말을 강조한 데서 유래된 충효당과 풍산류씨 대종택인 양진당 등이 있어 꼭 둘러보는 것이 좋다.

yccho@fnnews.com

Hot 포토

많이 본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