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인터넷 패권전쟁 뜨거운데.. 입장조차 못 정한 한국
2016.09.18 16:31
수정 : 2016.09.18 21:33기사원문
인터넷이 일반인의 생활 뿐 아니라 산업 전체에 미치는 영향력이 극대화되면서 기업들 뿐 아니라 세계 각국 정부의 인터넷 질서 패권경쟁이 달아오르고 있다.
구글, 페이스북, 애플 등 미국 인터넷 기업들을 중심으로 짜여지고 있는 세계 인터넷 질서를 두고 중국 러시아 유럽연합(EU) 등 주요국 정부가 인터넷 질서에 적극 개입하고 나선 것이다. 당초 EU는 인터넷 질서에 대한 민간 자율을 존중하는 입장을 보였지만, 최근 구글에 대한 과세와 개인정보가 국경을 넘지 못하도록 하는 정보주권을 강조하면서 적극적으로 정부가 인터넷 질서에 개입하는 모양새를 취하고 있다.
중국과 러시아는 애초부터 국가 안보와 개인정보 보호, 자국 산업 보호를 위해 국가 주도의 인터넷 질서 정립을 주창해 왔다.
반면 미국은 "인터넷 세상은 철저히 민간 자율에 의해 질서가 유지돼야 한다"며 정부 개입을 강력히 반대하고 있다.
인터넷 질서에 대해 '민간 자율'을 주장하는 미국의 입장에 대해 일부 인터넷 전문가들은 '민간=미국 기업'이라는 공식이 유지되고 있는 현 인터넷 산업구조를 유지하기 위해 미국 정부가 자국 기업을 보호하려는 고도의 전술을 펴는 것이라고 비판하는 목소리도 내놓고 있다.
특히 당초 인터넷 주소(IP) 관리의 주체를 누구로 할 것인가를 놓고 대립하던 세계 주요국가들의 인터넷 패권경쟁은 이제 △망중립 논란 △구글세 등 인터넷 기업에 대한 과세 방식 논란 △개인정보보호와 보안으로 범위가 확산되고 있다.
세계 각국이 다양한 영역에서 인터넷 질서의 패권을 쥐기 위한 치열한 다툼을 벌이고 있는 가운데, 세계 최고의 인터넷 인프라와 활용도를 자랑하는 우리나라는 아직 구체적인 입장을 정하지 않은채 중립 입장만 반복하고 있다. 이에 대해 전문가들은 우리나라가 전세계 인터넷 질서에서 주변국으로 전락하는 것 아니냐는 걱정의 목소리도 내놓고 있다.
구글의 정밀 지도데이터 해외 반출 요구에 대한 우리 정부의 입장이나, 구글, 페이스북, 애플 등 글로벌 인터넷 기업에 대한 과세 기준, 글로벌 기업에 의한 한국인 개인정보 유출에 대한 대처방안등에서 우리 정부가 여전히 입장을 정하지 못한채 사안별로 대처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전문가들은 "인터넷 정책이 통상문제, 외교문제 등 다양한 이슈와 연계되고 있는 추세를 감안, 우리 정부도 인터넷 질서 패권경쟁에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명확한 입장을 세워가야 할 시기가 됐다"며 "인터넷 패권경쟁과 외교, 통상의 실리를 확보할 수 있는 우리나라 차원의 인터넷 거버넌스 정립 논의를 본격화해야 한다"고 조언하고 있다.
■인터넷 패권 경쟁, 본격화
18일 업계에 따르면 미국 정부는 오는 10월부터 인터넷 주소 통제권을 민간 기구인 국제인터넷주소관리기구(ICANN)의 감독권을 버리고, ICANN 자율에 맡기기로 했다. ICANN은 1988년 세계 인터넷 주소를 편성하기 위해 설립된 비영리기구지만, 그 동안 미국 상무부의 감독을 받아왔다.
ICANN은 IP와 도메인 설정을 최종적으로 결정하는 기구로, 극단적으로는 한국의 국가 도메인(.kr)도 좌우할 수 있는 권한이 있는데 미국 정부가 이 권한을 민간에 넘기겠다고 나선 것이다.
인터넷 업계 한 전문가는 "미국 정부가 ICANN 감독권을 폐지하겠다고 나선 것은 인터넷 거버넌스의 기본이 되는 권한을 민간에 완전히 이양하겠다고 선언한 것"이라며 "이는 역설적으로 세계 주요국가 정부가 인터넷 질서에 개입하려는 강한 의지를 보이고 있는 현재 상황을 무마하기 위해, 미국 정부가 민간 자율의 인터넷 거버넌스를 선제적으로 선언한 것으로 봐야 한다"고 분석했다.
인터넷이 등장하면서 국제 무대에서는 국제전기통신연합(ITU)의 역할이 통신 분야로 한정되고 글로벌 표준 논의에 한정되고, 오히려 ICANN이 힘을 받아왔다. 지난 2013년께 미 국가안보국(NSA)의 무차별 개인정보 수집과 주요국가 정상 도청 등이 폭로되면서 미국 중심의 인터넷 주소관리에 대한 불만이 터졌고 미국은 이 권한을 민간 다자기구인 ICANN에 넘기기로 한 것이다.
그러나 중국과 인도는 인터넷을 민간다자 기구에서 관리하는 것을 지지하면서도, ITU차원에서 정부 주도의 인터넷 질서 관리가 필요하다는 점을 주장하고 있다.
아울러 중국은 지난 7월 인터넷 정보화를 끌어올려 사이버 강국으로 발돋움하기 위한 '국가정보화발전전략 요강'을 발표한데 이어 유엔과 함께 인터넷 거버넌스 토론회를 공동 개최하는 등 글로벌 인터넷 권력구도 개편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이는 전세계 국가들이 수용할 수 있는 인터넷 분야 규칙을 마련하겠다는 의지로, 인터넷 주소 관리체계의 변화와 함께 인터넷 패권 경쟁이 본격화되고 있음을 알리는 신호탄으로 해석되고 있다.
■다양한 이슈별 협력과 갈등 반복
인터넷 주소 관리 외에도 과세와 망중립성, 정보보호 등 다양한 이슈로 인터넷 거버넌스 범위는 크게 넓어져 국가별로 다양한 이슈에 대한 패권경쟁이 확산되고 있다.
미국과 EU가 민간 중심의 다양한 이해관계자들이 논의해 인터넷 주소관리 체계를 다뤄야 한다는 입장에 공감하면서도 구글과 애플 등 미국 인터넷기업에 대한 과세 문제를 놓고는 첨예한 대립을 펼치는 것도 주도권 다툼의 한 대목이다.
구글, 애플 등 미국 인터넷 기업의 영향력 확대와 텐센트, 알리바바 등 중국 인터넷 기업의 성장은 글로벌 인터넷 산업 주도권과 맞물려 있고 한때 통신분야 강자였던 EU는 자신들만의 인터넷 세상을 만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양상이다.
현실세계와 인터넷 영역의 불일치가 '디지털 경제'라는 새로운 틀을 만들어내 이제 막 논의에 접어든 만큼 인터넷 질서 개편에 있어 먼저 주도권을 잡으려는 각 국가별 논쟁만 치열해지고 있다.
인터넷진흥원(KISA) 관계자는 "미국이 인터넷 거버넌스에 있어 IP 주소 관리 권한을 내려놓아 전세계 인터넷 권력구도가 바뀌는 계기가 마련됐다"며 "이제 미국 외 다른 국가가 인터넷에서 힘을 가질 수 있는 여지가 생겼고 EU나 중국 등은 이슈별로 다른 대응에 나설 것"이라고 말했다.
미래창조과학부 관계자는 "예전 인터넷 거버넌스는 주소라는 자원 하나로 얘기하니까 쉬웠지만 이제는 인터넷이 사회를 변화시키면서 논의가 다양해지고 있다"며 "보안을 비롯해 인터넷으로 할 수 있는 거의 모든 것이 다뤄지면서 이에 대한 세부 이슈별 논의는 사실상 이제 시작했다고 봐야 한다"고 말했다.
■우리나라도 실리 챙기는 인터넷 거버넌스 정립 논의 본격화해야
이같은 상황에서 한국은 외교적 입장을 고려해야 하는 만큼 독자적인 의견을 내기가 쉽지 않은게 현실이다.
특히 우리나라 입장에서는 인터넷이라는 신 산업을 만들고 질서를 주도하고 있는 미국이나, 새로운 인터넷 강자로 발돋움하려는 중국 양측이 안보, 경제 등 모든 분야에서 중요한 우방들이이서 섣불리 어느 한쪽의 입장을 옹호하기도 어려운 상황이다.
박재천 인하대 정보통신대학원 교수는 "한국이란 나라의 국력 자체가 뚜렷하게 입장을 내보일 힘을 가진 나라가 아니다보니 그동안 무역이나 기술적인 면에서 미국을 따라왔다"며 "중국과 EU 때문에 인터넷 패권 다툼에 새로운 변수들이 생겼으니 지금으로선 예의주시하고 실용적으로 길을 찾아나가는 방법밖에 없다"고 진단했다.
박 교수는 "인터넷 거버넌스는 기술적인 문제가 아닌 정치.외교적인 문제로, 외교부의 입장 등 전반적인 외교 입장을 고려해야 한다"며 "한국도 국내를 비롯해 동남아시아 시장을 차지하며 나름 인터넷 산업에서 자리를 확보한터라 지금 당장 글로벌 인터넷 정책의 입장을 바꾸는 것도 위험하다"고 덧붙였다.
hjkim01@fnnews.com 김학재 기자
*인터넷 거버넌스는 인터넷 세상 전체에 적용할 질서를 정하는 정책의 기본 틀. 초기에는 인터넷 주소가 인터넷 거버넌스의 핵심이었으나 최근 인터넷 활용도가 넓어지면서 망중립성, 개인정보보호, 사물인터넷(IoT) 등으로 범위가 급속히 넓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