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장, 대리, 사원.. 직급 없애라지만 아직은‘어색한 동거’

      2016.10.31 17:56   수정 : 2016.10.31 21:34기사원문
# "직급파괴문화가 대외적으로 우리 회사 이미지를 좋게 하는 데 일조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런데 사실 직급이 없는 게 아니다. 누구는 부장, 누구는 사원, 대리 이런 거 다 있고 서로 다 안다. 다만 부르지 않을 뿐이다. 그런데 웃기는 건 상무한테는 상무님이라고 한다는 점이다.
" (국내 대기업 관계자)

# "직급파괴 도입에 큰 의미를 두지 않는 분위기도 있지만 사원부터 부장까지 직급 구분이 없어지니까 능력만 되면 낮은 직급의 사람들도 할 말을 하는 계기가 될 것이란 기대도 있다." (삼성전자 관계자)


성장 한계 돌파를 위해 국내기업들이 속속 도입중인 사내 '직급파괴' 제도가 성장통을 겪고 있다.

국내 기업들은 과거 '상명하복'의 군대식 기업문화의 한계를 절감하면서 미국 실리콘밸리의 아이콘이 된 '스타트업'의 핵심 성장동력인 직급파괴 문화를 도입중이다. 임직원 간 직급 장벽을 없애 수평적 분위기를 만들고, 업무 유연성을 기르겠다는 취지다.

문제는 여전히 경직된 우리 사회의 관료 문화와 연장자.선배 우대 전통이 미국식 실리콘밸리 정신과 상충되며 제도 도입이 쳇바퀴 돌고 있다는 지적이다.

■"한국도 실리콘밸리처럼…"

재계에 따르면 최근 전통적인 직급 체계를 변화시켜 새로운 기업문화를 만들려는 국내 기업의 시도가 잇따르고 있다.

삼성전자는 내년 3월 기존 부장, 과장, 사원 등 직급 단계를 기존 7단계에서 4단계(CL1∼CL4)로 단순화할 예정이다. 임직원 간 호칭은 '○○○님'으로 통일하기로 했다. 이는 스타트업의 빠른 실행력과 소통 문화를 조직 전반에 심겠다는 '컬처혁신'의 일환이다.

LG전자는 사원, 대리, 과장, 차장, 부장 등 기존 직급은 유지되지만 파트장, 팀장 등 '직책' 중심의 조직 운영을 실험 중이다. 과장이 팀장이 될 수 있고, 그 밑에 차장이나 부장이 팀원이 될 수 있다. LG디스플레이는 직급 단계를 줄였으며 LG이노텍 등 다른 계열사도 이를 검토 중이다.

SK는 국내 대기업 가운데 직급 체계 개편이 가장 잘 된 곳으로 평가받고 있다.

SK텔레콤이 2006년 도입한 '직급파괴' 인사실험은 이제 도입 10년을 맞이해 완전히 자리잡았다. 사원부터 대리, 과장, 차장, 부장까지 촘촘했던 평사원 직급을 팀장과 매니저로 확 줄여 조직의 탄력성을 극대화한 것이다. 효과는 생산성으로 나타나고 있다. 실제 SK텔레콤은 경쟁사의 절반에 못 미치는 인력 규모에도 연매출은 2배나 많다.

SK하이닉스도 2011년 선임-책임-수석으로 창사 27년 만에 직급을 손질한 바 있다. 회사 관계자는 "선임이라고 후배에게 일을 떠 넘기는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며 "기존 직급제에서 문제됐던 승진 부담감 및 스트레스 누적, 우수성과자에 대한 보상 왜곡 등도 해결됐다"고 만족했다.

■"김과장 시절이 좋아" 옛 직급으로 '유턴'

모든 기업에서 직급 파괴가 성공한 것은 아니다. 실패한 사례도 있다.

지난해 한화는 2년4개월간 쓰던 '매니저' 제도를 버리고 예전 직급 체계로 돌아갔다. 사원부터 차장까지 '매니저'로 통합해 호칭하던 직급 체계를 사원.대리.과장.차장 명칭으로 전환했다.

한화는 수평적 조직문화를 조성하기 위해 부서명을 팀으로 바꾸고 매니저 제도를 도입, 신속한 의사결정과 업무 효율성을 기대했지만 오히려 업무 현장에서는 혼선이 빚어졌다. 직원들이 고객과 만나 '매니저'라고 소개해도, 구체적인 직급을 다시 물어보는 등 애로사항이 자주 발생한 것이다.

한화 관계자는 "매니저 제도가 국내에 익숙지 않다 보니, 업무 일선에서 시행착오를 많이 겪었다"며 "고객 및 거래 상대방의 편의를 위해 예전 직급 체계로 돌아가기로 했다"고 전했다.

'승진'이 지상 목표가 된 직원들이 직급 단순화 탓에 동기부여를 상실할 수 있다는 것이 직급 파괴의 대표적인 부작용으로 지적된다.

KT도 5년만에 실패를 인정하고 2014년 직급제로 복귀했다. KT도 직원의 사기 진작이 그 이유라고 설명했다.


■'반쪽짜리' 한국판 직급파괴

직급 파괴와 관련해 국내 기업들의 한계가 여전하다는 지적도 많다.

직급파괴라는 형식적 제도 도입이 아니라 기업 비전과 경영 마인드 등 환경 전반을 감안한 제도 혁파가 우선이라는 것이다.

실제 삼성전자가 내년 시도하는 직급파괴는 직원에만 국한된 얘기다. 임원을 부를 때는 기존과 같은 'OO 상무님' 'OO 전무님'으로 불러야 한다. 이는 '직급체계 개편이 안착했다'고 평가받는 SK도 마찬가지다. 윗사람에게는 깍듯하고, 아랫사람끼리만 자유로운 다소 어정쩡한 '한국판 뉴(New) 기업문화'다.

업계 관계자는 "기업문화 개선은 기득권을 가진 임원들의 마인드 변화가 출발점"이라면서 "윗사람이 먼저 편한 분위기를 조성해줘야 부하직원도 점차 창의적인 능률을 발휘할 것"이라고 말했다. 국내 기업에 뿌리 박힌 관료 문화를 바꾸기 위해선 임원부터 기득권을 내려놔야 한다는 얘기다.

CJ에 재직중인 한 직원은 "상위 임원들의 경우 여전히 과거 기업문화에 익숙하기 때문에 직급파괴를 하면서 '님'이라고 불러도 사실 세대가 바뀌어야 나아질 것 같다"면서 "그래도 다른 대기업에 비해서는 그나마 우리회사가 더 유연한 것 같다"고 말했다.

신입사원인 배 모씨가 다니고 있는 회사는 몇 달 전 '직급파괴' 공지가 내려왔지만 결국 흐지부지됐다.

CEO가 다른 기업의 사례를 듣고 갑자기 추진했지만 직원들과 제대로 소통하지도 않은 채, 대안 없이 제도를 도입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기존에는 '사원-대리-과장-차장-부장-이사' 등의 직급이 있었지만, 부서장 이하의 실무자들끼리는 직급을 부르지 말라는 지시가 상부에서 내려왔다. 그러나 호칭 대안이 따로 정해지지 않아, 직원들은 더 불편해지고 소통도 어려워졌다.

첫 한 달 동안은 직원들끼리 "저기…"라고 부르며 어색하게 다녔다. 최근에는 CEO가 보는 자리가 아니라면 예전처럼 직원들끼리 직급을 부르고 있는 상태다.

배씨는 "직원들이 자율적으로 호칭을 정해서 쓰게 했다면 과도기를 거치다가 '직급파괴' 문화가 정착됐을 수 있었을 것"이라며 "의사소통 활성화라는 목적이 아니라, 상부에서 일방적으로 지시하다 보니 부작용만 생겼다"고 토로했다.


SK텔레콤에 재직중인 이 모씨는 "직급구분없이 '매니저'라고 부르고 있는데 오히려 직급 높은 사람한테도 매니저라고 부르니까 부를 때마다 망설여 지는 것 같다"면서 "오히려 이런 호칭 변화보다는 직급에 상관없이 다양한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하는 이런 방향으로 일하는 방식을 바꾸려는 움직임이 더 중요한 것 같다"고 말했다.

일각에서는 애초에 대기업에 스타트업 정신을 강조하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재계 관계자는 "비용절감 차원의 맹목적인 직급 단순화 시도는 결국 실패를 볼 수밖에 없다"면서 "기업들은 단기간 인사체계 개편 성과를 위해 급진적인 변화를 강요하기보다 장기적인 관점에서 서서히 변화를 주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조언했다.

특별취재팀 조창원 팀장 박지영 김경민 윤지영 한영준 홍예지 장민권 김가희 이태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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