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처펀드에게 물어뜯겼던 ‘97년의 악몽’대한민국 사모펀드의 토양 됐다

      2017.01.05 19:10   수정 : 2017.01.05 19:10기사원문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지금까지 20여년간 국내 자본시장은 사모펀드(PEF)의 성장 스토리다.

론스타, 뉴브리지캐피털, 칼 아이칸 등 외국계 PEF들의 기업사냥부터 시작해서 보고펀드, MBK파트너스 등 토종 PEF들의 육성과 발전으로 진행되기 때문이다.

PEF는 1997년 외환위기로 도산위기에 빠진 대기업들에 대한 외국계 PEF의 투자로 소개됐지만 이들이 당시 국내의 자본시장법망이 두텁지 않다는 것을 겨냥하고 대기업들의 경영권을 위협하거나 헐값에 은행과 증권사 등을 인수하면서 국내에서는 '기업사냥꾼'이라는 부정적인 이미지만 남겼다.



이들에게 수업료를 치른 정부와 일부 자본시장 플레이어들은 국내에서도 외국계 PEF들의 대항마를 키우자며 토종 PEF 설립 움직임을 보였다. 2004년 보고펀드를 시작으로 국내 PEF들이 태동한 것이다.
외환위기는 국내 자본시장에서 △토종 플레이어가 육성되지 않았다는 점 △대기업들의 은행 의존도가 컸다는 점 △기업 지배구조와 주주권 행사가 허약하다는 점 등의 수많은 숙제를 던진 셈이었다.

■돈벌이에 눈먼 해외 PEF

외국계 PEF들은 이른바 벌처펀드라는 형식으로 국내 기업의 경영권을 싹쓸이했다. 벌처펀드는 부실채권을 사들여 기업의 경영권을 인수한다. 동물의 �은 시체(부실채권)를 찾아다니는 콘돌 같은 존재라는 의미에서 벌처(콘돌)펀드라는 이름이 붙었다.

이들은 구조조정으로 부실화된 기업을 싼 값의 부실채권으로 매입하는 전략을 취해 이른바 '땅짚고 헤엄쳐' 국내시장에서 큰 수익을 벌었다. GMO펀드는 지난 2003년 현대엘리베이터의 경영권 분쟁을 이용해 100억원에 가까운 차익을 남기기도 했다.

골드만삭스는 지난 1999년 국민은행 지분투자를 시작으로 진로 등 부실기업만 인수해 대박을 터트리기도 했다. 당시 5억달러 규모의 국민은행 지분을 인수해 9000억원 이상의 매각차익을 올렸고, 진로의 최대주주에 대한 경영권 간섭을 시도하면서 수익을 챙기려는 움직임도 보였다. 윌버 로스 전 로스차일드 회장은 한라그룹, 경수종금, 해동화재, 일은증권 등을 구조조정하면서 개인적으로 수천억원의 수익을 올리기도 했다.

문제는 이들이 부실기업을 정상화시키는 긍정적 역할이 아닌 수익만 빼먹는 방식으로 국내 시장의 물을 흐렸다는 것이다. 경수종금은 지난 1981년 수원의 작은 종금사로 출발했다가 1999년 영국 리젠트그룹에 인수됐지만 당시 진승현게이트에 발목이 잡히면서 영업정지당했다. 해동화재는 1953년 설립된 손해보험사이지만 2000년 리젠트그룹에 인수돼 리젠트화재라는 이름으로 경영됐지만 지난 2002년 청산절차를 밟았다. 일은증권도 마찬가지였다.

론스타의 외환은행 인수와 매각은 한국 공무원 사회와 금융권에 '변양호 신드롬'이라는 만연한 책임회피까지 낳았다. 현재 하나금융지주에 인수돼 KEB하나은행으로 통합됐지만 외환은행 인수와 통합까지 내홍이 계속돼왔다.

이 같은 수업료를 지불한 정부는 2004년부터 PEF 육성을 강조해왔지만 은행들 간의 이해관계와 금융당국의 규제 문제 등으로 제대로 추진되지 못했다. 국내 자본시장 플레이어들이 스스로 하나둘씩 합심해 보고펀드 등이 탄생하기 시작한 것이다. 민간 플레이어들의 작은 움직임이 현재 60조원 이상의 PEF 시장을 일궈낸 것이다.

■백기사로 나선 국내 PEF

민간 플레이어들로 육성된 PEF들은 2008년 금융위기 이후 그 활약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금융위기로 자금난에 봉착한 대기업 그룹들의 구조조정에 지원군으로 나선 것이다.

먼저 미래에셋맵스자산운용과 IMM PE는 지난 2009년 두산밥캣을 인수한 두산그룹의 지원자로 나섰다. 당시 미래에셋 등은 국민연금 등에서 출자받은 펀드로 PEF를 조성해 두산DST와 SRS코리아, 삼화왕관, 한국항공우주산업(KAI) 등 4개 계열사 지분을 패키지로 사들였다. 이 패키지를 인수한 특수목적회사의 51% 경영권 지분은 두산에 주고 49%를 보유해 위기를 넘기고 계열사를 제값에 매각하는 묘수를 만들어낸 것이다.

두산은 4개 계열사 매각으로 4000억원 규모의 신규자금을 거뒀고 경영권도 지킬 수 있었다. 이 구조조정안은 PEF로서도 밑지는 장사가 아니었다. IMM PE 등은 이후 삼화왕관과 SRS코리아의 지분을 팔아 각각 40%, 100%에 가까운 수익률을 올렸다.

이 같은 국내 PEF들의 전략은 '에셋 풀링(Asset Pooling)'이라는 방식으로 창의적 모델이라고 인정받고 있다. 산업은행이 PEF로 금호아시아나그룹의 대우건설 지분을 매입하거나 동부그룹의 일부 자산을 매입하는 등 현재도 구조조정 사례로 활용되고 있다.

MBK파트너스와 한앤컴퍼니는 이미 구조조정 기업에 대한 지분투자에 적극 나서고 있다. 지난 2013년 MBK파트너스는 웅진그룹의 계열사인 웅진코웨이를 사들여 3조원 가치의 기업으로 키워냈으며, 한앤컴퍼니는 지난 2014년 한진해운 벌크선 사업부와 올해 현대그룹 벌크선 사업부를 매입해 통합시키기도 했다.

금융당국도 PEF들의 활약에 힘입어 지난해 임종룡 금융위원장이 "사모펀드 특별법을 도입하겠다"고 언급하는 등 PEF 지원에 나서고 있다.
정부는 지난 2014년 외국인투자촉진법을 개정해 해외 PEF들의 국내 대기업 장벽을 완화했다. 기업들도 리스크가 큰 일부 투자 건에서는 PEF와 동반 진출하는 방안을 모색 중이다.
투자은행(IB) 업계 관계자는 "국내 자본시장에서 PEF는 없어서는 안될 존재가 됐다"며 "이제는 보다 적극적인 바이아웃 전략을 구사할 수 있도록 정부 등이 지원해줘야 한다"고 말했다.

maru13@fnnews.com 김현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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