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극의 '영애'에서 '야인'으로, 첫 여성대통령에서 구속된 朴전 대통령
2017.03.31 15:33
수정 : 2017.03.31 19:09기사원문
부모를 모두 총탄에 잃은 비극의 '영애'에서 2막 고독한 '야인'으로 다시 3막 첫 여성대통령으로 화려하게 정치인생을 꽃피웠으나 마지막 4막은 헌정 사상 첫 대통령직 파면에 이어 뇌물수수 등 13개 혐의를 받는 피의자 신분으로 전락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 사망 이후 18년간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박근혜 전 대통령이 정치에 뛰어든 건 1997년 말 15대 대선에서 이회창 한나라당 대선후보를 지지하면서부터다.
그로부터 그는 항상 한국 보수정치의 중심에 서 있었다. '박정희의 딸'이란 타이틀은 가장 큰 정치적 유산이었다. 박정희 향수는 정치신인이었던 그를 단숨에 여의도 정치의 중앙무대에 올려놓을 정도로 강력했다. 1998년 4월 대구 달성 국회의원 보궐선거에서 초선의원으로 국회에 입성했을 때가 46세였다. 여기에 특유의 원칙과 약속을 지키는 깨끗한 이미지가 결합되면서 신뢰의 정치인으로 이미지를 각인시켰다. 정치적 감각과 승부사적 면모까지 갖춰 위기때마다 당을 구해내는 구원투수이자 여왕이었다. 2004년 한나라당 '차떼기'(불법 정치자금 수수) 파문과 노무현 대통령 탄핵 역풍으로 한나라당이 위기에 빠졌을 때가 대표적이다. 당 대표로 등판한 그는 정당 역사상 유례없는 '천막당사'를 발판으로 '50석도 어려울 것'이라던 총선에서 121석을 얻었다. 그 뒤 2006년 6월 대표직에서 물러날 때까지 2년3개월 동안 지방선거와 각종 재·보궐선거에서 여당을 상대로 '40 대 0'의 완승을 거두며 '선거의 여왕'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2006년 5월20일, 서울 신촌로터리에서 지방선거 유세 도중 오른쪽 뺨 11㎝가 찢기는 테러를 당했을 땐 병상에서 "대전은요?"라는 한 마디로 단숨에 지지층을 결집시키는 면모를 보였다.
2007년 당 경선에선 이명박 후보에게 밀렸으나 또 다시 위기에 빠진 당의 구원투수로 전면에 나서 당명을 새누리당으로 바꾸고 개혁에 착수, 2012년 4월 총선에서 야권연대로 맞선 민주통합당을 누르고 과반의석(152석) 확보에 성공했다. 이후 민주통합당 문재인 후보를 누르고 18대 대선에 승리하면서 청와대를 떠난 지 34년 만에 대통령의 딸에서 대통령 자격으로 청와대에 재입성했다.
재임초기 창조경제, 규제개혁, 노동·공공·금융·교육 등 4대개혁을 기치로 한 경제혁신 3개년 계획을 수립했고 북한의 핵포기를 전제로한 한반도신뢰프로세스와 통일준비위원회,유라시아이니셔티브 등을 추진했다. 하지만 임기 초반부터 빚어진 고질적인 불통문제와 인사참사로 점차 개혁의 동력을 잃어갔다. 정치파트너인 국회와의 소통문제도 여의치 않았다. 심지어 임기 중반부터는 과거 자신의 대선을 위해 뛰었던 김무성 전 새누리당 대표와 유승민 전 원내대표 등 여당 내 비박근혜계 지도부와 충돌을 빚기도 했다. 이후 정윤회 문건파동의 후속타인 고 최태민 목사의 딸 최순실씨의 국정농단 사태로 인해 결국 지난 3월 10일 헌법재판소로부터 파면 선고를 받았고 그리로부터 19일만에 피의자 신분으로 구치소에 수감되는 운명을 맞이했다.
앞서 먼저 구속수감됐던 노태우 전 대통령(1995년 11월, 뇌물죄)과 같은해 12월 전두환 전 대통령(12.12 군사반란과 비자금 조성)은 다음해 각각 무기징역과 징역 17년의 형을 확정받았지만 1997년 12월 22일 특별사면되면서 2년여간 수감된 바 있다.
ehcho@fnnews.com 조은효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