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 타워링

      2017.06.15 17:11   수정 : 2017.06.15 17:11기사원문
번영의 상징인 고층빌딩이 무시무시한 재앙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 각인시킨 사건이 1971년 서울 명동의 대연각호텔 화재였다. 들썩이는 성탄 전야를 보내고 모두가 한가로운 휴일 아침을 즐기던 12월 25일 오전 9시 50분쯤 호텔 2층 커피숍에서 프로판가스가 폭발했다. 불은 냉난방 덕트(공기 통로)를 타고 삽시간에 22층 꼭대기까지 번졌다.



10시간이나 계속된 불은 163명의 목숨을 앗아간 후 가라앉았다. 불을 피해 창 밖으로 뛰어내렸다가 죽은 사람도 38명이나 됐다.
온 국민은 TV 생중계를 보며 화마의 공포에 진저리쳤다. 국내 최고층 빌딩 중 하나였던 대연각호텔은 화재에 무방비상태였다. 스프링클러나 화재차단시설, 옥외비상구 같은 건 애초에 없었다. 소방당국도 고층빌딩용 장비가 없어 우왕좌왕했다.

대연각호텔 화재를 모티브로 만든 영화가 1974년 개봉한 '타워링(Towering Inferno)'이다. 존 길러민.어윈 앨런이 공동감독한 이 영화는 규격미달 전기배선을 쓴 138층 초고층 빌딩에서 합선으로 일어난 화재를 다뤘다. 건축가 역을 맡은 폴 뉴먼이 화재가 진압된 후 남긴 대사가 귀에 생생하다. 그는 "불탄 빌딩을 어떻게 할거냐"는 질문에 "몰라, 그냥 놔둬야지. 온갖 위선의 상징으로"라고 읊조린다.

지난 14일 새벽(현지시간) 영국 런던 서부의 24층 아파트 '그랜텔 타워'에서 대형 화재가 발생해 주민 십수명이 희생됐다. 화재 당시 120가구 400~600명 주민이 있던 것으로 추정돼 인명 피해는 더 커질 듯하다. 화재는 발생 50분 만에 43년된 건물 전체로 번졌다. 불에 취약한 싸구려 마감재 때문인 것으로 추정됐다. 건물에 비상탈출구가 하나뿐이었던 데다 화재 발생 당시 경보기마저 울리지 않아 주민들이 신속히 대피하지 못했다.


늘 그렇듯 고층건물 화재는 천재(天災)가 아니라 인간의 오만과 태만이 빚은 인재(人災)다. 런던 화재에서도 불 속에서 구조를 요청하는 주민들을 보고도 구할 수가 없었던 모양이다.
현장은 소방차의 접근마저 어려웠다고 한다. 얼마나 많은 재난을 더 겪어야 인간은 안전불감증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ljhoon@fnnews.com 이재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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