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혹한 대우받고 사라진 비운의 실미도 공작원 46년만에 영면

      2017.08.23 15:17   수정 : 2017.08.23 15:17기사원문

북한의 특수부대에 맞서기 위해 창설됐지만, 가혹한 훈련과 부당대우에 반발해 진압된 '실미도 부대(일명 684부대)' 공작원들의 유해가 46년 만에 영면에 들었다.

국방부는 23일 "경기도 벽제에 신축한 군 제7지구 봉안소에서 오늘 오전 실미도 공작원 합동봉안식을 군 장례 절차에 따라 엄숙히 거행한다"고 밝혔다.

실미도 부대는 1968년 1월 21일 청와대를 습격하기 위해 김신조를 비롯한 북한 특수부대 31명이 서울로 침투한 '1·21 사태'에 대응하고자 같은해 4월 1일 공군 예하부대로 창설됐다.



영종도 인근의 실미도에서 김일성을 제거하기 위한 훈련을 받았던 공작원들은 목적을 이루지도 못하고 아까운 인명만 희생한 채,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북한 특수부대원 31명과 동일하게 구성됐지만, 가혹한 훈련탓에 7명이 훈련중에 사망했다.
더욱이 남북간 화해 분위기 조성이되면서 북파작전은 연기되자 공작원들은 혹독한 훈련과 열악한 보급및 보수미지급에 반발했다.

결국 공작원들은 1971년 8월3일 기간병 18명을 살해하고 실미도를 빠져나 왔다. 이들은 버스를 탈취해 청와대로 가기위해 대방동까지 진입했지만, 이들을 저지하기 위해 출동한 군과 경찰과 교전을 벌였다.

이 교전으로 공작원 24명 중 20명이 죽고, 경찰 2병과 민간인 2명이 사망했다. 살아남은 4명은 군법회의에 회부돼 사형을 선고받고 1972년 3월 10일 처형됐다. 처형된 4명의 유해는 아직도 확인되지 않고 있다.

당시 정부는 이들이 '군 특수범'이었다는 발표했지만, 대다수는 일반인이었고 2003년 12월 영화 '실미도'가 개봉되기 전까지 군에서 금기시되어 왔다. 그러나 국민적 관심이 집중되자 이듬해 2004년 정부는 '실미도 부대'의 존재를 확인했다.

교전 중 숨진 공작원 20명의 유해는 벽제 공동묘지에 가매장된 상태였지만, 국방부 과거사 진상규명 위원회는 사건 조사와 함께 이들 유해를 발굴했던 것이다.

그러나 힘들게 발굴된 공작원의 유해가 영면에 들기까지 12년이라는 긴 시간이 걸렸다.

실미도 부대 공작원 유해의 안치 방식 등을 둘러싸고 국방부와 유가족이 이견을 빚었기 때문이다. 결국 국방부가 오랜 협의 끝에 유가족 요구를 수용하기로 하고 지난 2월 합동봉안식 일정에 합의했다. 유가족 요구대로 실미도 부대 공작원을 위한 별도의 안치소가 마련돼 사건 소개문과 유품 등이 진열됐다.
묻혀졌던 역사적 사실이 공식적으로 다시 드러난 셈이다.

실미도 공작원 추모기일이기도 한, 이날 봉안식에는 국방부가 발굴한 실미도 공작원 20명의 유해와 아직 유해를 찾지 못한 4명 중 2명의 위패가 봉안소에 안치됐다.


한편 국방부는 "사형 집행으로 숨진 실미도 공작원들의 유해 발굴을 위해 다각도로 노력하고 있다"며 "관련 사실을 아는 사람은 국방부로 제보해주길 바란다"고 밝혔다.

captinm@fnnews.com 문형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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