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교통 자리 양보 강요 No!, 의무가 아니라 배려입니다”

      2017.10.15 09:00   수정 : 2017.10.15 09:00기사원문

직업 특성상 철야 근무가 잦은 신만수(가명·32)씨. 철야를 하면 평균적으로 오후 6시에 출근해 다음 날 오전 9시에 퇴근을 한다. 철야 근무를 마치고 퇴근하는 날에는 정신이 몽롱하고 생체 리듬도 무너져 몸 또한 무겁다. 만수씨는 인천 집에서 직장이 있는 충무로까지 지하철로만 약 1시간 10분 정도 소요된다.



지난 9월 만수씨는 철야를 마치고 집으로 가기 위해 지하철에 몸을 실었다. 출근시간이 지난 탓에 쉽게 자리에 앉을 수 있었던 만수씨는 너무 피곤해서 꾸벅꾸벅 졸았다.
10분쯤 지났을 때 누군가 만수씨 다리를 툭툭 쳤다. 만수씨는 잠결에 사람들이 타고 내리면서 건드릴 수 있다고 생각해 다리를 오므렸지만 자꾸 툭툭 치는 느낌을 받았다. 알고 보니 어떤 할아버지가 지팡이로 다리를 툭툭 친 것이었다.

만수씨와 눈을 마주친 할아버지는 눈짓으로 자리를 비키라는 무언의 압박을 했다. 몸이 힘들었지만 문제를 일으키고 싶지 않았던 만수씨는 결국 자리를 양보했다. 그 후로 한참 동안 자리가 나지 않아 집까지 서서 갔다.

만수씨는 “노약자석도 아니고 일반 자석에 앉아 졸고 있었는데 자는 사람을 깨워 자리를 비키라고 하는 할아버지 행동에 황당했다”며 “양보를 당연히 해야 한다는 몰상식한 어른들 때문에 화가 난다”고 말했다.

출근하기 위해 사당역에서 버스를 기다린 오미희(가명·28)씨. 워낙 유동인구가 많은 역이라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의 줄은 뒤가 안 보일 만큼 쭉 늘어섰다. 그런데 버스가 도착하자마자 새치기하는 노인들 때문에 줄은 흐트러졌고 미희씨는 결국 버스를 타지 못했다. 그다음 버스가 도착할 때도 노인들의 새치기가 계속되자 참을 수 없었던 미희씨는 한마디 했다. 그러자 새치기 한 노인은 “젊은 사람이 왜 그렇게 빡빡하게 그러냐?”며 오히려 화를 냈다.

겨우 버스에 탑승한 미희씨는 서 있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자리에 앉았는데 앞에 서 있던 할머니가 계속 부딪히며 무언의 압박을 가했다. 30분은 더 가야 했던 미희씨는 죄송한 마음도 들었지만 괘씸하다는 생각에 모른 척하며 자리를 양보하지 않고 눈을 감은 채 음악을 들었지만 가는 내내 따가운 시선 때문에 마음이 편치 않았다.

미희씨는 “몸이 불편한 것도 아닌데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무조건 자리 양보를 강요하는 일부 어른들 때문에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 짜증이 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라며 “나이 갑질 좀 그만했으면 좋겠다”고 밝혔다.

주말에 신촌에서 친구들을 만나기 위해 최홍민(가명·31)씨는 서울대입구역에서 2호선에 탑승했다. 지하철은 비교적 한산했고 자리도 드문드문 비어 있어 일반 자석에 앉은 홍민씨. 두 정거장이 지났을 무렵 노인 두 분이 홍민씨 앞에 서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한 노인이 계속 힘들어하는 척을 하며 자리 양보를 은근슬쩍 어필했다.

홍민씨가 별다른 반응을 하지 않자 노인 두 분이 이번에는 “신도림역이 환승역이니깐 많이 내려 그때는 탈 수 있을 거야”라며 큰소리로 대화를 주고받았다. 하지만 노인들의 예상과 달리 신도림역에서도 자리에 앉지 못하자 이번에는 대놓고 홍민씨에게 자리를 양보해 달라고 요구했다.

홍민씨는 처음에는 무시했지만 잇따른 지적에 화가 나 결국 노인들과 말다툼까지 하게 됐다. 홍민씨는 “자리가 비어서 앉았는데 무조건적인 자리 양보 요구는 아니라고 생각해 자리를 비켜주지 않았다”며 “심지어 몸이 불편해 보이지도 않는데 힘든 척 연기하는 모습에 어이가 없었다”고 말했다.

누구나 한 번쯤 지하철, 버스 등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 자리 때문에 불편한 상황을 경험했을 것이다. 어떤 어른들은 노약자석이 비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반 자석으로 와서 자리가 나기를 기다리거나 눈치를 주기도 한다. 일부 몰상식한 노인들은 노약자석이 본인들만의 전유물이라고 여기고 젊은이들은 당연히 자리를 양보해야 된다고 생각한다. 이를 악용하는 노인들 때문에 자리싸움은 끊임없이 반복되고 있다.

하지만 노약자석은 노인 전용이 아니라 임신부, 장애인, 영유아 동반자, 노약자 등 교통 약자를 위한 자리이다. 즉, 몸이 불편하거나 겉으로는 티가 잘 나지 않지만 초기 임신부처럼 약자들을 위한 배려 공간인 것이다.


지난 5월 국가인권위원회는 ‘대중교통 이용 시 무조건적인 자리 양보 강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라는 주제로 일주일 동안 설문조사를 실시했다. 140 여 개의 댓글을 살펴본 결과 대부분 반대 입장을 피력했다. 다음은 반대 입장에 대한 댓글들이다.

“어떻게 보면 인색하고 잔인한 말일 수도 있지만, 똑같은 돈을 내고 어쩌면 일부 노인분들은 무료로 지하철을 탑승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앉아서 가고자 하는 마음은 모두 같고, 똑같은 돈을 내고 혹은 돈을 내지 않은 사람을 위해 희생을 강요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젊은 사람들은 서서 가야지라고 하는 옛날식 유교문화·꼰대문화는 사라져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자리는 양보해주고 싶으면 해주고, 본인이 힘들거나 자리 양보해주기 싫으면 안 할 수도 있습니다. 그 선택은 본인의 것입니다.”

“배려가 당연한 문화가 되어야겠지만 강요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많은 분들이 땀 흘려 일한 근로자, 밤새워 공부한 학생, 야근하고 퇴근하는 분이기도 합니다. 여러 변수들이 있기에 무조건적인 자리 양보는 반대하며 개인의 선택, 자발적인 양보에 맡겨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자발적인 양보는 몰라도 강요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사회적 약자를 배려하는 것은 좋지만 '호의가 계속되면 권리인 줄 안다'라는 말처럼 의무가 아닌 호의를 마치 당연시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따지고 보면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 나이·성별 관계없이 똑같은 '소비자'인데 누구는 배려를 받고 누구는 그렇지 않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역차별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게다가 빈자리가 있는데도 굳이 양보하기를 원하시는 어르신들도 간혹 만나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로부터 우리나라는 ‘동방예의지국’으로 불리면서 어른을 공경하는데 익숙하다. 하지만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 오로지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자리 양보를 강요해서는 안 된다. 내가 힘들면 양보를 안 할 수도 있는 것이고, 교통비를 정당하게 지불하고 이용하는 데 무조건 자리를 양보해 줄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대중교통 자리 양보는 의무가 아니라 배려다.
호의를 자신의 권리라고 착각하면 안 된다. 또한 사람마다 가치관이 다르기 때문에 무엇이 옳다 그르다고 규정할 수 없다.
상식이 통하지 않는 사람들의 인식 변화가 필요한 시점이다.

hyuk7179@fnnews.com 이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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