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폐청산 땐 피레네산맥을 보라

      2017.11.20 17:05   수정 : 2017.11.20 17:05기사원문

문재인 대통령 인기가 높다. 지난주 갤럽 조사를 보면 지지율이 73%에 이른다. 취임 여섯달이 넘었지만 도통 식을 줄 모른다.

문 대통령은 여러모로 노무현 대통령과 닮았다고 한다. 한 가지만 빼면 맞는 얘기다.
바로 지지율이다. 취임 6개월 때 노 대통령 지지율은 30%를 밑돌았다. 문 대통령은 늘 노 대통령을 한발 뒤에서 따라갔지만 지지율만큼은 저만치 앞서간다.

대통령 지지율은 정권의 밑천이다. 지난 2007년 신년 인사회에서 노 대통령은 "국민들의 평가를 잘 받고 싶은 욕심이 있지만 작년(2006년)에 완전히 포기했다"고 말했다. 2006년 5월에 열린 지방선거에서 한나라당(현 자유한국당)이 압승했다. 집권 열린우리당은 참패했다. 이 분위기는 2007년 겨울 대선으로 이어졌다.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가 싱겁게 이겼다. 대통령의 밑천이 달리면 정권이 넘어간다.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문 대통령 지지층은 개혁.적폐청산 의지를 가장 높게 평가한다. 반대층은 거꾸로다. 과거사 들춤.보복 정치를 가장 못마땅하게 여긴다. 적폐청산을 보는 눈이 제법 엇갈린다는 걸 알 수 있다. 전체 지지율이 높으니 반대파의 시각을 싹 무시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명실상부한 통합의 정치에 무게중심을 둔다면 보수 비판층을 잘 다독일 필요가 있다.

이른바 87년 체제가 들어선 뒤 가장 화끈한 적폐청산을 이끈 인물은 김영삼 대통령이 아닐까. 1995년 김 대통령은 쿠데타의 주역인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을 구속했다. 국회는 여야 합의로 5.18특별법을 제정해 처벌 근거를 만들었다. 이듬해 대법원은 전두환에게 무기징역, 노태우에게 17년형을 선고했다. 김 대통령의 결단에 대다수 국민이 공감했다. 모름지기 적폐청산은 이래야 한다.

문 대통령은 이미 가장 큰 적폐를 없앴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파면 당했고 감옥에 갇혔다. 그런데 이것만으론 모자란 듯 전 정권, 전전 정권 인물들을 줄줄이 잡아넣을 태세다. 전직 국정원장들은 특수활동비를 엉뚱한 데 썼다는 혐의를 받는다. 친박 실세 정치인도 압수수색을 당했다. 종래 어떤 헌재 재판관도 특활비로 구설에 올랐고, 비박 정치인은 특활비를 생활비로 썼다고 실토한 적이 있다. 누구는 그냥 넘어가고 누군 철창에 가두면 형평성을 놓고 시비가 인다.

조선시대에 환국(換局), 곧 정권교체는 피바람을 불렀다. 숙종 때 남인과 서인이 엎치락뒤치락할 때마다 반대파의 씨를 말렸다. 서인의 영수이던 송시열도 사약을 받았다. 21세기에도 그 전통이 이어지는 것 같아 마음이 무겁다. 이 점에선 보수.진보가 다를 바 없다. 명분이야 얼마든지 있다.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사람 없으니까. 그래서 큰 정치가 필요하다. 적폐청산하면서 협치하자고 하면 누가 믿겠는가.

프랑스 철학자 블레즈 파스칼은 명상록 '팡세'에서 말한다. "한 줄기의 강이 가로막는 가소로운 정의여! 피레네 산맥 이편에서는 진리, 저편에서는 오류!"('팡세'.민음사, 이환 옮김). 자기 잣대로 남을 함부로 재단하지 말란 뜻이다. 정의와 진리를 독점하면 자칫 독선으로 흐른다. 적폐란 말엔 오만이 묻어 있다. "나는 맞고 너는 틀렸다"고 단정한다. 파스칼은 말한다.
"사람들은 틀렸다는 말을 듣기 싫어한다." 적폐라는 말을 듣는 순간 두고 보자, 독기를 품는다.
적폐청산은 함부로 휘두를 무기가 아니다.

paulk@fnnews.com곽인찬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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