힐링의 섬에서 스타트업 성지로…발리를 바꾼 ‘네트워킹의 힘’
2018.03.04 17:10
수정 : 2018.03.05 14:02기사원문
【 자카르타.발리(인도네시아)=박소연 박지애 기자】 붉은 노을이 짙게 깔린 해변에 즐비하게 늘어선 고급 호텔들. 신나는 음악에 몸을 맡기는 관광객들. 24시간 잠들지 않는 관광의 '메카' 발리의 이미지다.
발리 덴파사르 응우라라이 공항에 내려 고급 호텔 체인이 즐비한 쿠타 해변 대신 숲이 우거진 우붓으로 향했다. 발리의 유명한 '트래픽 잼'을 뚫고 1시간30분가량 달리면 '아시아의 뉴욕'이라는 우붓을 마주할 수 있다. 문화.예술의 성지답게 수공예품과 목공 제품을 즉석에서 만들어내고 원숭이들이 길가를 활보한다. 야생을 떠올리는 몽키포레스트 바로 앞에 디지털 노마드들의 성지 '후붓(HUBUD)'이 있다.
■마사지 받고 업무…워라밸 좇는 사람들
"발마사지 받고 오는 길이에요. 클라이언트와 통화할 시간이 돼서요." 아일랜드 출신 건강관리사 에밋 루이씨(33)는 지난주 프로젝트를 끝내고 다음 프로젝트까지 한 달의 여유시간 동안 발리에 머물고 있다. "아일랜드가 겨울에 너무 추워서 왔다"는 그는 어떤 자세가 특정 질환을 낫게 하는 데 가장 효율적인지 연구해 컴퓨터 프로그램으로 구현해내는 업무를 맡는다. 클라이언트와의 소통은 후붓 미팅룸에서 스카이프로 한다.
후붓에 가만히 앉아 초록이 우거진 풍경과 숲을 보고 있노라면 저절로 힐링이 되고, 원숭이들이 눈앞에서 노는 모습은 비현실적이기까지 하다. 업무능률이 높아지는 기분이다. 후붓 회원들이 자유롭게 모이는 1층 기둥에는 군데군데 요가볼이 놓여 있다. 1층에서 일하는 회원들은 요가볼을 의자 삼아 일하기도 한다. 집중이 필요하면 2층에 있는 '사일런트 공간'에서 이어폰을 낀다. '이어폰을 낀 사람에겐 말 시키지 말라'는 게 이곳의 보이지 않는 규칙이다.
'코워킹스페이스' 후붓은 공간에 모이는 사람들을 '연결'해 주는 역할을 한다. 서로 소개하고 친분을 쌓는 것만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스티븐 먼로 최고경영자(CEO)의 철학에 따라 코워킹의 시너지를 살리기 위한 프로그램들이 운영된다. 매주 수요일 새 회원을 위한 오리엔테이션이 진행되며 금요일에는 기존 회원들과 브런치 미팅이 열린다.
홈페이지와 관련해 애로를 겪고 있으면 회원 중 웹디자이너를 연결해 주고 경영이 막히면 성공한 경영자를 멘토로 소개해주는 식이다.
■"코워킹 근본은 네트워킹"
실리콘밸리가 아닌 발리에 이런 공간이 처음 들어선 것이 신기했다. "왜 발리였나"라는 질문에 먼로 대표는 '영감(inspiration)'이라고 답했다. 후붓을 열기 전 유엔에서 10년간 일했던 먼로 부부는 '다른 세상'을 원했지만 유엔의 폐쇄성과 경직성에 직면했다. "일하던 곳인 캄보디아에 남느냐 고향인 캐나다로 돌아가느냐 아니면 제3의 국가에 정착하느냐 세 가지 선택지 중 답은 발리였어요."
무언가에 이끌리듯 정착한 발리에서도 그는 번화가 대신 소도시를 택했다. "발리의 바다는 예쁘지만 태국, 베트남 등 인근에 대체할 수 있는 곳들이 많죠. 심지어 제주 바다도 빼어나죠. 그런데 우붓은 달랐어요. 사람들이 엮여 사는 모양새가요. 발리가 인도네시아의 심장이라면 우붓은 발리의 심장입니다."
100년 넘도록 수공예, 목조, 음악 등 예술의 성지였던 우붓. 여기 위치한 후붓은 어떻게 스타트업의 성지가 됐을까. 먼로 대표는 "처음 우붓에 온 건 아이들이 다닐 대안학교 '그린스쿨' 때문이었다. 그런데 여기에 우리 같은 사람이 많이 오더라"면서 "루틴한 삶을 벗어나 뭔가 다른 걸 하고 싶은 사람들이 모였다"고 설명했다. 그는 다양한 세계의 사람들을 만나면서 이런 사람들을 엮으려면 뭘 할 수 있을까에 착안했다.
먼로 대표는 2013년 후붓을 열 당시를 회상했다. "처음 열었을 때는 목적이 뚜렷하지 않았어요. 단지 어떻게 창조적인 사람들을 위한 공간을 만들 수 있을까 고민했죠. 어떻게 하면 다른 방식으로 일하고 살고 싶은 창의적인 사람들이 모일까. '워라밸'이죠. 후붓을 오픈했을 때는 이미 이 근처에서 그런 삶을 사는 사람들이 있었고 그들이 모여든 겁니다."
스타벅스도 할 수 있는 일 아니냐고 되물었다. 먼로 대표는 "자석이랄까, 귀향이랄까…. 비슷한 사람들이 모여요. 이들은 서로 만나 어떻게 효율적으로 일할지 얘기하다가 어떻게 바다에서 놀지 얘기하죠. 친구들은 각각 루틴한 삶을 살고 있는데 자기만 괴짜 같고 혼자인 것 같았던 사람들끼리 모이는 '공동체'죠. 시너지를 냅니다. 그가 말하는 코워킹스페이스의 궁극적 목표 역시 네트워킹이었다. 후붓은 창업 5년 만에 85개국에서 7500명의 회원을 확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