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가 세운 한반도 유일 위령비 발견
2018.03.25 11:01
수정 : 2018.03.27 09:03기사원문
경기도 고양시 화전동 화전동공동묘지에 위치한 ‘경성조차장 제3공구내 무연합장지묘’(京城 操車場 第三工區内 無緣合葬之墓)라는 비석으로 지금까지 한반도 내에서 일본인이 세운 묘비가 확인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위령비가 세워진 지리적 특성을 감안할 때 이 비석이 중국 등 해외에서 강제동원된 노동자들의 죽음을 위로하기 위한 것 아니냐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25일 역사학계와 주요 관계자들에 따르면 경기도 고양시에서 일본력으로 소화(昭和) 15년 3월, 즉 서기 1940년 3월에 만들어졌다고 표기된 위령비가 발견됐다. 높이 2.1m·너비 60cm의 화강암으로 만들어졌으며 2단 비대석을 깔아놓아 한눈에 보기에도 크고 튼튼하게 세워뒀다. 뒷면에는 ‘산 15번지’, ‘산 2번지’라는 주소가 명시돼 있어, 무연고 시신이 발견되거나 목숨을 잃은 장소를 표기한 것으로 추정된다.
비석의 맨 아래에는 ‘주식회사 간조수색출장소 건립’(株式會社 間組水色出張所 建立)이라 쓰여 있다. 비석을 세운 주체가 명기된 것이다. 단 위령비에는 매장된 시신의 이름이나 국적 그리고 몇 구의 시신을 합장했는지에 대한 정보는 표기하지 않았다. 이를 종합해볼 때 이 비석은 1940년에 주식회사 하자마구미 사가 경성조차장 3공구 건설장에서 죽거나 발견된 무연고 시신을 합장해 안치한 위령비라는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일제 토목자본의 전형 '하자마구미'
하자마구미는 일제가 일으킨 러일전쟁과 함께 조선에 진출해 1903년 경성 영업소를 설치하고 식민지 인프라를 구축한 기업이다. 2015년 국무총리 산하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 조사위원회'가 연구조사한 자료에 따르면 일제강점기 하자마구미는 주로 철도·수력 발전소·비행장 등의 토목사업을 맡아 한반도 내 총 33개소의 사업장에서 경부선, 한강철교, 압록강 철교, 대전 유성비행장, 수풍 수력발전소 등에 참여했다. 이 과정에서 1226건의 강제동원 관련 피해 건수가 확인됐으며 현재 한국인 생존자는 17명으로 파악된다. 이명수 자유한국당 의원이 발표한 299개 전범기업 중 한 곳으로 지목되기도 했다.
또 1990년 하자마구미가 펴낸 '하자마구미 100년사'에 따르면 이 회사는 1940년 조선총독부 철도국이 발주한 당시 고양군 은평면 수색리에 경성조차장 건설에 참여했다고 기록했다. 당시 철도국은 한반도의 철도 물동량이 크게 증가하는 반면, 경성역(현 서울역)과 용산역의 규모가 협소하고 확장할 수 있는 여지가 없어 경성과 부산·평양과 함께 '3대 조차장' 건설을 계획했다. 이중 경성조차장은 부지만 약 10만여 평 달하는 어마어마한 면적에 당시 예산 1300만원이 투입됐다. 그러나 1945년 일본의 패망으로 완공되지는 못했다.
■"지속적 조사연구 필요"
비석이 발견된 화전동 공동묘지도 심상치 않다. 비석이 발견된 공동묘지 내에는 약 700기에 달하는 무연고 묘가 수두룩하다. 인근 주민들은 덕은동 국방대학교 터가 일제강점기 시대 중국·러시아 등에서 끌려온 포로를 수용한 포로수용소가 있던 곳이라고 입을 모았다. 당시 포로들은 아침에 수용소를 나와 각 현장에 노역을 갔다가 저녁에 돌아오길 반복했으며, 주민들은 포로들이 워낙 시끄러워 수용소가 있던 언덕을 '짱꼴라 고개'이라 불렸다는 증언들도 나왔다.
또 인근에서 오래 살았던 주민들은 일본인은 시신을 차로 실어와 공동묘지에 묻거나 골분을 뿌리기도 했으며, 때로는 이름을 새긴 목판을 두고 가는 모습을 수차례 목격했다고 덧붙였다. 이에 따라 당시 포로들은 인근 조차장과 철도관사·육군 창고·비행장 등의 군사 시설 건설현장에 투입됐고, 이 과정에서 숨진 시신을 화전동 공동묘지에 안치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비석 또한 수백구 의 무연고 묘들 중 한가운데 세워져 있다.
관계 기관 담당자와 학계에선 하자마구미의 위령비 발견과 함께 일제의 한반도 내 강제동원에 대한 지속적인 역사 연구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확산되고 있다.
비석을 처음 발견한 정동일 고양시청 역사문화재 위원은 “이 일대는 그린벨트와 군사보호구역에 묶여 오랫동안 개발되지 않으면서 원형을 그대로 유지할 수 있었다”면서 “전국 어디에서도 일본인이 자국 외의 사람들을 위해 묘비를 세운 전례가 없지만 신원이 밝혀지지 않아 정확히 어떠한 목적을 가지고 세웠는지에 대해 추정하긴 어렵다”라고 밝혔다.
정혜경 일제강제동원 평화연구회 연구위원은 "이 비석은 여전히 미스터리 한 부분이 많다"며 "일제 말기 당국은 무연고자를 위한 비석을 설치할 여유가 없었다"고 설명했다. 그는 "당시 강제 동원된 조선인이 숨지면 출신 지역에 통보를 하게 했고, 특히 경기도 사업장에는 대부분 인근 지역 출신이 투입됐기 때문에 이 비석의 주인은 조선인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고 추정했다. 그러면서 "앞으로 지속적인 조사와 연구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호사카 유지 세종대학교 교수는 "일본 도쿄의 하자마구미 본사에 위령비에 관한 기록이 남아 있는지 확인하고 자료 공개를 요청해 연구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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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miana@fnnews.com 정용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