英 스파이 테러, 푸틴은 뭘 얻었나

      2018.03.16 17:31   수정 : 2018.03.16 17:31기사원문


몇 년 전 아내를 잃고 지난해에는 아들마저 자동차 사고로 떠나보낸 아버지(66)는 주말을 맞아 자신을 만나러 온 딸(33)과 쇼핑몰로 향했다. 술집에서 간단히 한잔 하고 이탈리아 레스토랑에서 점심 식사를 한 이들 부녀는 레스토랑을 나선 지 정확히 40분 뒤 주변 공원 벤치에서 의식을 잃고 쓰러진 채 발견됐다.

아버지는 전직 러시아 이중스파이 '세르게이 스크리팔'이었다.

러시아 군정보기관인 총정찰국(GRU) 소속 전직 장교로 지난 2006년 러시아 정보기관 인물들의 신원을 영국 해외담당 정보기관인 비밀정보국(MI6)에 팔아넘긴 혐의로 기소돼 13년형을 선고받았다. 2010년 냉전 시대 이후 미국과 러시아의 첫 대규모 스파이 맞교환 때 풀려난 뒤 영국에 정착했다.
이웃을 집에 초대해 음식을 나눠 먹을 정도로 친근한 사람이었던 그는 지금 딸과 함께 영국의 한 병원 침대에서 중태에 빠져 있다.

영국은 이번 암살시도 배후로 러시아를 지목했다. 테리사 메이 영국 총리는 암살 시도에 사용된 신경작용제가 1970~1980년대 러시아에서 군사용으로 개발된 노비촉(Novichok)으로 밝혀졌다며 러시아에 해명을 요구하는 최후통첩을 보냈다. "증거가 없다"며 러시아가 해명요구를 무시하자 영국은 러시아 외교관 23명 추방 등 대러시아 제재안을 신속히 발표했고 미국, 독일, 프랑스 등 서방 3개국도 영국 편에서 러시아를 압박했다. 이에 러시아가 보복조치를 예고하며 전 세계는 냉전시대보다 더 위험한 상황으로 빠져들고 있다.

러시아가 이번 암살시도의 배후라면 제재와 국제적 고립을 야기할 이런 위험천만한 일을 왜 지금 벌였는지를 놓고 다양한 설이 나오고 있다.

먼저 18일 대선을 앞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국내에 강력한 메시지를 보내기 위해서라는 분석이 있다. 현재 80% 안팎의 지지를 얻어 4선이 확실시되는 푸틴 대통령이지만 부동층의 표심을 끌어모으고 러시아 정부 내 매파 세력을 안심시키기 위해 이런 모험이 필요했다는 것이다.

푸틴 대통령은 정권의 정당성을 유지하기 위해 높은 투표율과 압도적 승리가 필요한 상황이다. 러시아 독립 여론조사기관 레바다센터가 최근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러시아 유권자 가운데 대선 때 반드시 투표하겠다고 밝힌 이는 28%에 불과했다.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 탈퇴) 투표 이후 영국이 얼마나 약해졌는지 시험하기 위해서라는 분석도 있다. 영국 버킹엄대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 소장인 앤서니 글리스는 '스크리팔은 푸틴이 벌이는 게임의 볼모였다'고 주장한다. 이번 암살시도로 다른 국가들이 적극적으로 영국을 지지하고 나서는지를 살펴 브렉시트 이후 영국이 유럽에서 고립되는지를 판단하려 했다는 것이다.

이번 암살시도가 오히려 러시아의 나약함을 보여주는 것이라는 지적도 있다. '원조 스트롱맨' 푸틴 대통령이 대내외적으로 '강한 러시아의 부활'을 외치며 장기집권해왔다는 점에서 의아할 수 있다.

세바 구니스키 캐나다 토론토대 정치과학대 교수는 그러나 "믿지 않을지 모르겠지만 오늘날 러시아는 나약함 때문에 행동에 나서고 있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대외적으로는 서방의 계속되는 경제제재, 대내적으로는 반푸틴 정서 확대와 후계구도 불안 등에 취약하다는 것이다.

가장 최악의 시나리오는 푸틴 대통령의 승인 없이 이번 암살시도가 이뤄졌을 경우다.
러시아 정부 내에 이 같은 일을 자유로이 할 수 있는 인물이 존재한다면 이는 푸틴 대통령이 국가안보 이슈에 대해 통제권을 잃었다는 의미가 될 수 있다고 구니스키 교수는 주장했다.

sjmary@fnnews.com 서혜진 국제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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