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란의 '펜스룰' "또 다른 형태의 성차별" vs "가해자 되지 않기 위한 방어"
2018.04.01 13:53
수정 : 2018.04.01 13:53기사원문
#. 2018년 남성이 성범죄자가 되지 않는 방법 1. 지하철에 탔을 댄 양손을 어깨 높이 위로 올리십시오. 2. 회사에선 여직원과 눈을 마주치지 말고 대화도 나누지 마십시오. 업무 때문에 불가피할 경우는 메신저를 이용하십시오. 3. 회식과 단합모임에서도 가능하면 여직원은 배제시키시고 그게 힘들다면 2의 원칙을 지키십시오.
#. "지하철역에서 밑으로 넘어지는 여자를 피해서 여자가 다쳤다. 물론 나랑은 물리적 접촉은 하나도 없었다. 바로 내 앞으로 떨어졌는데 독박 쓸 거 같아서 옆으로 피했다.
최근 인터넷에서 올라오는 '펜스룰' 관련 게시물이다. "성추행범이 되기 전에, 아예 여성과의 접촉을 피해야 한다"는 주장을 담은 게시물은 일부 남성들에게 큰 지지를 받고 있다.
들불처럼 번지고 있는 '미투(Me too) 운동'에 대한 반작용으로 남성들 사이에서 유행어처럼 나오고 있는 '펜스룰(Pence Rule)'. 그러나 '또 다른 형태의 여성차별'이라는 비판을 받으며 논란의 중심이 됐다.
남녀갈등을 상징하는 단어가 돼 버린 '펜스룰', 성범죄와 남녀갈등을 해결할 수 있는 근본적인 방법은 없을까.
■종교적 자기검열로 시작된 펜스룰
펜스룰이란 단어는 미국 부통령 '마이크 펜스'가 한 발언에서 나왔다. 지난 2002년 연방 하원의원 시절, 그는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아내가 없는 자리에서 다른 여성들과 함께 술자리를 갖지 않는다. 아내가 아닌 여성과 단둘이 저녁을 먹지 않는다"고 말했다. 펜스는 "술을 먹는 자리에는 남성과의 술자리에서도 몸가짐을 조심하며, 자주 거절한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이런 발언은 펜스가 처음은 아니다. 미국의 빌리 그레이엄 목사는 1948년 한 집회에서 청교도적 절제를 준수하자는 취지에서 이 룰을 제시했다고 알려졌다. 그는 남성들이 다른 여성과 단둘이 있을 때 성적인 유혹에 취약해진다고 믿었고, 이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처음부터 그럴 상황 자체를 만들지 않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를 '머데스토 선언(Modesto Manifesto)'이라고 불린다. 펜스도 인터뷰에서 빌리 그레이엄의 발언을 인용했다.
■한국선 '성폭력 무고' 방어기제로
길게는 70년 전, 짧게는 16년 전에 만들어진 이 룰이 어떻게 2018년 한국에 수입된 걸까. 지난해부터 불어 닥친 성범죄 폭로 운동인 '미투 운동'의 반작용으로 생겼다는 지적이 많다.
미국에서 만들어진 펜스룰이 종교적 의미에서 ‘자기 검열’ 수단에 가까웠던 반면, 한국으로 건너 온 ‘펜스룰’은 무고의 위험에서 스스로를 보호하겠다는 ‘방어 기제’로서의 의미가 더 강하다. 직장인 하모씨(32)는 "미투운동이 그동안 고통 받아 온 여성들의 외침이라면, 펜스룰은 미투운동 때문에 잠재적 성범죄자·가해자로 몰리고 있는 남성들의 방어 기제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또 다른 직장인 박모씨(30)는 "미투운동이 벌어지면서 '성폭력 무고'도 많아졌지만, 우리나라는 무고죄에 제대로 처벌이 이뤄지지 않는다"며 "무고 상황을 아예 피하려면 펜스룰 밖에 없지 않나"'고 털어놨다.
펜스룰 관련 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남성 응답자 53%가 “펜스룰은 성폭력 방지를 위해 필요하다”고 답했다. “펜스룰은 여성 배제의 수단이라”고 답한 남성 응답자(39%)에 비해 많았다.
■"또 다른 성차별, 문제해결 본질 아냐" 비판 거세
그러나 펜스룰은 '또 다른 성차별'이라는 비판을 피하지 못한다. 실제로 펜스 부통령도 미국언론에서 성차별주의라는 비판을 받았다. 남성을 유혹하는 존재로, 여성을 바라본다는 이유에서다.
이나영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는 "'펜스 룰'을 '미투' 운동의 대안으로 주장하는 이들은 성범죄의 원흉이 여성에게 있으니 여성을 배제하겠다는 식으로 상황을 잘못 진단한 것"이라며 "결국 여성을 공격하는 또 다른 방식인 셈"이라고 지적했다. 직장인 최모씨(31)는 "'여자와는 무엇을 안 한다'는 말을 하는 사람은 차별주의자라고 생각한다"며 "남자건 여자건 상대방에게 하는 몸가짐을 조심하면 된다"고 말했다
남성들 중에서도 펜스룰에 부정적인 의견은 많다. 대학생 김모씨(27)는 "무고죄에 대한 법적 기준이 당장 바뀌지 않는 상태에서 남성들이 방어기제로 펜스룰을 이야기하는 것 같다"면서도 "펜스룰은 결코 본질적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성폭력 무고'가 문제라면, 문제를 해결하자는 반응이 맞다"며 "'범죄자가 될 수 있으니 여자들을 멀리하겠다'는 반응은 투정같다"고 덧붙였다.
정근식 서울대학교 사회학과 교수는 "미투운동은 성희롱·성추행 등의 문제가 우리사회에 만연한 일상적인 폭력임을 돌아보게 한 성찰의 기회"라면서 "펜스 룰 등으로 미투 운동의 본질이 흐려져서는 안된다"고 강조했다.
■"남녀갈등으로 끝나선 안 돼… 소통창구 열려야"
'권력형 성범죄'를 폭로하고자 시작된 미투운동은 '펜스룰'이라는 반작용을 낳으며, 남녀갈등으로 변질됐다. 구정우 성균관대 사회학과 교수는 "남성들이 잠재적 가해자로 오해받는 것에 반감을 느끼는 것은 일부에만 해당하는 극단적인 현상이 아니다"며 "이들의 분노가 함축하는 걸 읽어내야 미투 운동이 연착륙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일각에선 일련의 갈등을 '성별구도'로 볼 것이 아니라는 주장도 나온다. 대학원생 이모씨(30)는 "미투운동은 성별구도가 아니라 권력구도인데, '약자'들끼리 싸우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며 "미투운동의 본질은 '권력자'가 저지른 성범죄를 고발하는 것인데, '여자라서 당했다, 남자는 잠재적 성범죄자'라는 남녀갈등 문제로 변해버렸다"고 안타까움을 나타냈다.
계속되는 ‘남녀갈등’의 고리를 끊으려면, 대화와 공감이 해결책이라는 진단이 나온다. 고강섭 한국청년정책연구원 책임연구원은 "펜스룰 등 조직 내에서 소통이 차단되는 모습을 보이지만, 오히려 남녀 간 소통창구가 더 많이 열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임운택 계명대 사회학과 교수는 "가치관은 하루아침에 바뀌는 게 아니다"며 "양성평등 교육이 의무교육 단계에서부터 꾸준히 진행돼야 한다"고 말했다.
fair@fnnews.com 한영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