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XX가” 갑질 상사에 녹음 버튼 꾹, 을의 ‘반격’
2018.04.22 09:30
수정 : 2018.04.22 18:10기사원문
화학업체 대리 A씨(32)는 회의 때마다 식은 땀방울이 이마에 맺힌다. 이사는 기분에 따라 “이 XX 저 XX”라거나 "XX놈"이라고 욕을 하기 때문이다. A씨는 몰래 휴대폰 녹음버튼을 꾹 누른다.
A씨는 증거를 남겨놓지 않으면 나중에 발뺌할 것을 우려해 이같은 복수방법을 생각했다. 그는 “증거로 녹취만한 수단이 없다고 들었다”며 “술을 마셔도 괴로움을 잊지 못하는데 나중에 회사 그만둘 때를 대비하는 것”이라고 했다.
22일 직장인 등에 따르면 상사의 직장갑질에 응수할 만한 방법이 마땅치 않은 하급자들이 비밀 녹취를 통해 증거 확보를 위한 ‘사내 녹취’가 확산되고 있다. 그러나 직장 불신 조장 및 부작용 우려 목소리도 있고 일부 회사는 아예 업무중 녹음을 금지한다.
■ 분노 상사·미꾸라지 상사 “녹음 틀어주면 항복”
최근 ‘물벼락 폭행’ ‘욕설 논란’을 빚은 대한항공 조현민 전무 사건 등의 영향이 크다는 분석이다. 광고대행사 직원에게 갑질 의혹을 받는 조 전무가 과거 자사 직원에게도 욕설을 한 것으로 추정되는 녹취록까지 폭로되는 등 파문이 커지고 있다. 한 노무사는 “직원 입장에서 당할 수 밖에 없는 상황에서 임원의 잘못을 보여주는 녹취록을 폭로, 반격했다고 볼 수 있다”고 전했다.
직장갑질119 윤지영 변호사는 “직장인들이 괴롭힘을 당하면 녹음해야 한다는 인식이 늘고 있다”며 “가해자는 통상 갑질이 발생하면 인정하지 않는데 녹취록이 있으면 확실한 증거가 될 수 있는만큼 녹취조언을 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 단체에서 운영하는 카카오톡 채팅방의 직장인 800여명은 왕따, 부당 해고, 폭언 등이 일어나면 녹취부터 하라고 조언한다. 펜 녹음기, 휴대폰 녹음기 등 녹취 수단과 녹취 방법 등을 공유하기도 한다. 개인적인 복수 뿐만 아니라 녹취는 위법 행위에 대한 직접적인 증거가 될 수 있다는 판단에서다.
분노조절을 못하는 상사만 피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책임이나 잘못을 떠넘기기는 ‘미꾸라지’ 행위도 막을 수 있다고 한다. 평소 책임 떠넘기기를 자주 당하는 제약업체 직원 김모씨(34)도 통화녹음을 하고 있다. 그는 “처음에는 업무와 관련해 합의해놓고는 문제가 생기면 말을 바꿔 경위서를 쓰게 한 일이 한 두번이 아니다”며 “최근 통화 녹음을 한 뒤 말을 바꾼 사실을 직접 들려주니 아무소리도 못했다”고 설명했다.
녹취록은 법적 분쟁에서 증거로 사용된다. 회사에 근로계약서를 요구했다가 해고당한 마트 직원 류모씨(50)는 회사 임원이 욕설을 할 때마다 녹취를 해뒀다. 녹취록은 노동청 고소를 하면서 증거로 활용됐다. 류씨는 “이사가 욕설을 하거나 폭행한 점을 부인했지만 녹취파일을 공개하면서 발뺌을 하지 못했고 노동청도 이를 근거로 조사중”이라고 말했다.
반면 상대방 모르게 녹음한다는 점에서 당하는 입장에서 볼멘소리도 나온다. 직장 동료끼리 불신 조장 및 불편한 일을 만들거나 회사 기밀이 유출될 수 있다는 우려다.
직장 내 녹음을 전면 제한하는 회사도 있다. 지난해 4월 쿠팡은 내부규정으로 생활보안지침을 두고 전 직원에게 업무 중 녹음을 전면 금지했다. 한 쿠팡 직원은 “업무 비밀을 지키고 직원끼리 신뢰 있는 분위기를 만든다는 점에서 녹음을 제한할 수 있지만 행위 자체를 금지하는 것은 당하는 직원들의 방어권을 빼앗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 직장 불신 조장, 기밀 유출 우려도
전문가들은 노동 분쟁 사건에서 녹취록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권두섭 변호사는 “노사간 분쟁이 발생하면 증명 서류 대부분을 회사가 갖고 있고 동료 직원도 회사 눈치 때문에 증언해주기 어렵다”며 “녹취록은 조작이 힘든만큼 명백한 증거로 받아들여지고 제3자 대화의 무단 녹취만 아니면 법적으로 문제되지 않는다”고 전했다.
이상혁 한국노총 법무팀 노무사는 “노동자 10명 중 9명이 부당행위를 당했다고 찾아와도 증거가 없다"며 “회사에 녹음 금지 규정이 있더라도 자신이 부당한 행위를 당한 사실이 증명된다면 단순히 녹취 사실만으로는 징계, 또는 법적 책임을 묻기는 어렵다”고 설명했다.
integrity@fnnews.com 김규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