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습키스하고 팔목 낚아채는 남자 주인공.. 그릇된 性인식 만드는 TV
2018.04.26 17:39
수정 : 2018.04.26 21:06기사원문
직장인 김희성씨(37.여)는 최근 종합편성채널의 한 예능 프로그램을 보고 눈살이 찌푸려졌다. 패널로 출연한 한 연예인이 정부의 부동산.교육정책을 언급하면서 "여자 3명 이상 모인 브런치 모임을 단속해야 한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그는 마치 여성들이 조직적으로 부동산.교육정책을 방해하는 것처럼 작전을 통해 담합행동을 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기습키스, 팔목 낚아채기가 남성성?
미디어가 성차별 '제작소'라는 지적이 나온다. 시청률이나 조회수 확보를 위해 여성 출연자들의 노출을 부각시키거나 외모를 평가하는 성왜곡, 성차별 등이 지속적으로 발생하기 때문이다. 미디어를 접하는 대중에게 잘못된 성(性) 인식이나 성 고정관념 등을 심어줄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한국양성평등교육진흥원이 지난달 지상파.종합편성채널.케이블 총 9개사의 예능.오락 프로그램 33편을 조사한 결과, 성차별적 내용이 56건으로 나타났다. 이 가운데 성 역할 고정관념을 조장하는 내용이 28건으로 전체 절반을 차지했고 외모지상주의 조장(9건), 여성의 남성에 대한 의존성향을 강조하는 부분(7건)도 많았다. 특히 여성을 성적대상화하거나 성폭력을 정당화하는 내용도 5건 발견됐다. 이 밖에 선정성을 강조하고 여성을 성적대상화시킨 장면이 고스란히 전파를 탔다. 반면 성평등적 내용은 7건에 불과했다.
드라마에서도 성차별 등이 담긴 장면이 빈번히 나온다. 여성 주인공을 항상 남자에게 순종적인 모습으로 묘사하거나 남자 주인공들이 여성에게 기습키스, 팔목 낚아채기 등 성추행을 마치 남성성이 있는 것처럼 그리는 식이다.
최근에는 한 드라마에서 데이트 폭력을 미화했다는 논란도 일고 있다. 한 케이블 채널에서 방영하는 드라마에서 남성 배우가 여성을 폭행하는 장면이 2분 가까이 노출됐다. 특히 폭행을 당하고 피를 흘린 여성은 "너 나 좋아하지"라고 되묻기만 한 채 아무 조치를 하지 않은 것. '좋아해서 때린다'는 데이트 폭력 등을 연상케 한다는 비판이 제기됐다.
대학원생 유민아씨(28.여)는 "드라마를 보면서 더 답답했던 것은 폭행당하고도 아무 저항을 못하는 여배우의 모습"이라며 "남자들이 여성을 좋아하면 때리는 것을 당연하듯 내보내고 여성들은 이런 모습이어야 한다고 조장하는 격"이라며 분통을 터뜨렸다.
TV 프로그램에서 각종 성차별 장면 등이 담겨도 제재는 제대로 되지 않는다는 지적이다. 지난 2015년 성차별 등 양성평등 규정 등을 위반해 방송통신심의위원회의 제재를 받은 프로그램은 모두 20개였으나 대부분 '권고' 또는 '의견제시' 정도 처분이었다. 주의 이상 징계는 5곳뿐이었다.
■"인쇄매체도 예외 아냐"…OO女 그만해야
인쇄매체 역시 성차별 인식이나 잘못된 성 고정관념 등에서 자유롭지 않기는 마찬가지다. 2015년 남성잡지 맥심 모델 출신의 한 여성이 경찰로 채용됐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다수 매체에서 사진과 실명을 고스란히 넣고 '제복 입으면 어떨까?' '경찰 하기 아까운 몸매' '발령지로 찾아가보고 싶다'는 등 자극적인 내용을 보도했다. 해당 경찰은 이후 스트레스를 받다가 이름을 바꾼 것으로 전해졌다.
여성들을 'OO女'라고 지칭하거나 성폭력 사건이 발생하면 주로 여성 피해자에게 초점을 맞춰 자극적으로 보도하는 경우도 있다. 이소원씨(28.여)는 "OO녀 제목을 한 기사를 볼 때마다 개념녀, 김치녀 등 여성을 어떤 틀 속에 가둬놓고 단정 짓는 것 같은 느낌"이라고 털어놨다.
변신원 양평원 교수는 "PD, 작가들이 프로그램에 성차별적인 부분이 있다고 인식해도 시청률을 높이기 위해 자극적인 방송을 만드는 구조인 것 같다"며 "종사자 개개인이 바꿔야 할 문제라기보다는 방송사 등에서 양성평등 인식을 먼저 교육해 문제점 등에 대해 서로 토론하는 문화 등이 조성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홍지아 경희대 언론학과 교수는 "기자들은 언론사에서 관행적으로 배워왔던 객관주의라는 나름의 취재 원칙을 갖고 있는데, 성 관련 보도에 있어서는 현재의 보도원칙이 정석이 아닐 수 있다는 판단을 해야 한다"며 "성 관련 보도 전 피해자 신분을 어디까지 노출시킬 것인지, 사진이나 영상을 어떻게 편집할 것인지 등 심도 있는 논의가 잘 이뤄지지 않아 미투 같은 경우 2차 피해로도 이어진다"고 분석했다. 그는 "기자 개인뿐만 아니라 매체 전반에서 성 관련 보도 가이드라인 제정 및 관련 교육을 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스포트라이트팀 박인옥 팀장 박준형 구자윤 김규태 최용준 김유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