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가 주는 위로
2018.05.30 16:54
수정 : 2018.05.30 16:54기사원문
며칠 전 멋진 영화 한 편을 봤다.
주인공 로버트 드니로는 평생을 '전화줄' 제작회사에 다니다 퇴직한 70대 후반 홀아비다. 아내는 8개월 전 저세상으로 가버렸고, 4명의 자식들은 미국 전역에 흩어져 살고 있다.
영감님은 명절 지나고 자식들 보러 길을 나선다. 뉴욕에 도착해 큰아들 집 앞에서 진종일 기다리지만 전화까지 불통이라 결국은 돌아선다. 큰딸집에 가니 아프다는 손주는 멀쩡하다. 알고 보니 남편과 헤어지려는 모양이다.
심란한 마음으로 덴버에 교향악단 지휘자로 있는 둘째를 찾아가니, 아뿔싸! 지휘자가 아니라 평생 드럼만 쳐왔다. 죽은 아내와 형제들은 알았던 모양인데 정작 소통수단 '전화줄' 만드는 자신만 몰랐던 걸 눈치 챈다.
영감님은 막내딸 보러 라스베이거스로 가다가 기차도 놓치고 불량배에게 봉변까지 당한다.
사면초가, 그는 거리 공중전화로 휘청거리며 들어가 아무도 없는 집에 전화를 건다.
벨이 울리다가 자동응답기가 작동한다. "헬로! 저는 지금 외출 중, 남편은 마당 잔디 깎고 있을 겁니다. 용건이 있으면 이름 남겨주세욧." 아내의 괄괄한 목소리에 영감님은 서서히 기운을 차리고 빈 전화기를 향해 말한다. "Everybody is fine !"
영화를 본 다음 날, 나는 우연히 옛 동료를 만나 그와 함께 일하는 젊은 다큐 PD와 저녁식사를 하게 되었다. PD는 '소리 채집'에 관심이 많다고 자신을 소개하며, 다시 '소리의 시대'가 올 거라고 했다. " 휘황찬란한 영상에 질린 현대인들이 곧 자연과 천연의 소리를 갈망할 때가 올 겁니다." 자신감 넘치는 그 말에 영화 속 아내의 목소리에 기운을 차리던 로버트 드니로의 모습이 떠올랐다.
삶이 복잡하고 치열해질수록 사람들은 위로와 힐링을 원한다. 젊은 PD의 말처럼 심신과 영혼이 지친 사람들이 천연의 소리를 갈망할 날이 곧 올 것 같다.
속초 앞바다 파도치는 소리, 강화도 우포리 갈매기 소리. 고향 초가집 낙숫물 소리, 논밭 뜸부기 소리.
그날 밤 나는 집으로 돌아오다 어머니 목소리를 녹음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얼른 전화기를 꺼냈다 "애비냐! 이 밤에 웬 전화야?"
나는 급히 전화기 녹음 버튼을 눌렀다. "얘야, 별일 없지? 늘 몸조심해라 응?"
이응진 한국드라마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