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도 버텨냈군” 암 선고 받은 천재 음악가의 담담함

      2018.09.10 09:39   수정 : 2018.09.10 09:39기사원문

나는 영화음악에 많은 애착을 갖고 있다. 엔니오 모리코네가 작곡한 <시네마 천국> 러브 테마나 <인생은 아름다워> 안녕하세요, 공주님을 들을 때 감상에 젖고 존 윌리엄스의 <스타워즈> 쓰론 룸과 <퍼시픽 림> 메인 테마에 탄성을 지르기도 한다. <전장의 크리스마스> 테마이자 국내에도 잘 알려진 ‘메리 크리스마스 미스터 로렌스’ 역시 내 콜렉션 중 하나다.



일본 음악가 류이치 사카모토를 주인공으로 한 다큐멘터리를 접한 건 국내 개봉한지 약 석 달이 지난 9월. 대부분 극장에서 영화를 내렸을 무렵이다. 영화 부제가 ‘코다’, 그러니까 문학에서 에필로그에 해당하는 단어니 늦게나마 리뷰를 하는 것도 나쁘지 않아 보인다.


관람한 극장은 서울 종로구에 위치한 에무시네마. 복합문화공간을 표방하는 에무 2층에 위치했다. 서울역사박물관과 광화문사거리 사이 골목으로 5분쯤 들어가면 만날 수 있다. 한적한 골목 한편에 세워진 건물이 인상 깊다.

2관 102석에 불과한 소형 영화관으로 장 내부에 화장실이 있을 만큼 작다. 그 아담한 크기에 귀엽다는 느낌이 든다. 다만 좌석이 그만큼 좁다. 엉덩이가 아플 수도 있으니 주의.


영화는 다름 아닌 후쿠시마에서 시작한다. 류이치 사카모토는 쓰나미를 버텨낸 피아노를 신기하게 쳐다본다. 피아노선을 튕겨보고는 홀로 읊조린다. “잘도 버텨냈군.” 그는 인후암 3기 판정을 받은 뒤 모든 음악활동을 정리했다. “20대에 데뷔한 이래 이렇게 오래 쉬는 건 처음”이라던 그는 평소 존경하던 이냐리투 감독으로부터 ‘레버넌트’ 작곡 의뢰를 받아 새로운 출발선에 선 상태였다.

아마도 그는 파도로 망가진 피아노에 자신을 투영한 것 같다. 생명을 위협하는 무언가를 온 몸으로 받아낸 뒤 이전과 다른 소리를 내기 시작했으니. 기존에 구상했던 음악들을 모두 뒤로한 채 말이다.

류이치 사카모토는 40년간의 음악인생을 담담히 풀어놓는다. <마지막 황제>에 쓸 음악을 만들어달라기에 일주일간 45개 곡을 만들었다거나, 감독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가 <마지막 사랑> 녹음 30분 전 인트로를 바꿔달란 요구를 했다거나. 그는 난색을 표했지만 “엔니오 모리코네는 바로 해주던데?”라는 말을 듣고 30분 만에 곡을 고쳐 대성공에 이르렀다.

“자연에 있던 물질에 공업력과 문명의 힘을 써서 거푸집에 넣고 소리를 조율한다. 피아노는 자연 상태로 되돌아가려 발버둥을 친다. 그런데 쓰나미가 피아노 소리를 자연으로 되돌려놓았다. 자연이 조율해준 소리가 내게는 좋게 느껴진다. 부자연스러운 건 인간이 조율한 소리다.”

영화 중반부에 이르러 이 말을 듣자니 직선과 곡선이 떠오른다. 자연 속에선 오직 곡선만이 존재한다. 직선은 인간의 것이다. 류이치 사카모토는 인간이 조율한 음악 대신 자연의 소리에 집중한다. 북극 눈이 녹아 흐르는 물속에 녹음기를 넣고 “소리를 낚고 있다”며 채음을 하고 숲속에 버려진 폐기물들을 두드린다. 그가 만드는 건 인간의 음악과 자연의 소리, 직선과 곡선 그 어느 중턱에 있다.


사실 영화를 보면서 민망함을 느꼈다. 내심 중병을 앓는 천재 작곡가가 기침이나 각혈을 하면서 고집스럽게 곡을 완성해나가는 모습을 상상했으니까. 자극적인 매체들에 노출돼 만들어진, 그야 말로 못된 생각이다. 류이치 사카모토는 담담히 알약 하나하나를 목 뒤로 넘기고 “침이 많이 분비되지 않는 모양”이라며 투덜거릴 뿐이다. 영화 속에서 그는 여느 때처럼 음악을 만들어나간다.

초보적인 관점에서 봤을 때, 영화는 장기보단 바둑에 가깝다. 승리를 향해 두는 장기처럼 일정한 목표를 두고 이야기가 진행되지 않는다. 바둑돌처럼 류이치 사카모토의 이야기가 하나하나 스크린 위에 놓여진다.

역시 음악가를 다루는 영화다보니 소리가 다채롭다. 세심한 울림들에 귀가 간지럽다. 활로 하이햇 심벌즈를 ‘켜는’ 소리가 그렇고, 연필이 오선지 위에 음표를 그리는 소리가 그렇다.

“앞으로 몇 년을 살지 잘 모르겠다. 20년이 될지, 10년이 될지. 혹시 암이 재발해서 1년이 될 수도 있고. 전혀 마음이 놓이지 않는다.” 류이치 사카모토는 음표 하나, 소리 하나에 신중해질 수밖에 없다.

피아노 건반을 두드리던 그는 “심각하다.
좀 더 열심히 날마다 손가락을 움직여야겠다”며 머쓱하게 웃는다. “언제 죽더라도 후회 없도록 부끄럽지 않은 것들을 좀 더 남기고 싶다”는 말처럼 류이치 사카모토는 새로운 음악인생을 시작했다.
오랫동안 그의 새로운 음악들을 듣고 싶다.

smw@fnnews.com 신민우 기자

Hot 포토

많이 본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