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형적 탁상행정' 서울 버스 표시판 논란, 그 뒷이야기
2018.11.06 13:48
수정 : 2018.11.06 13:56기사원문
‘확인해봄’은 잘못된 시민 의식과 제도, 독특한 제품·장소, 요즘 뜨거운 이슈 등 시민들의 다양한 궁금증을 해결해보는 코너입니다. 보다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고독한 팩첵커’가 직접 카메라를 들고 달려갑니다. 많은 제보 부탁드립니다.
오늘도 시민들의 든든한 두 다리가 되고 있는 버스. 버스 앞부분에는 승객들이 탑승할 버스를 잘 구별할 수 있도록 노선 번호와 행선지가 표시돼있는데요. 지난달 관련 보도가 나간 이후 뜨거운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노선 번호와 행선판을 더 알아보기 힘들었기 때문입니다. 서울시와 서울시버스운송사업조합은 지난 8월부터 버스 노선 번호와 행선지 표시판 디자인을 변경해 시범 운영하고 있었는데요. 시각장애인의 편의를 고려해 디자인됐다는 변경 시안은 시각장애인을 포함한 대다수 시민들의 거센 역풍을 맞았습니다.
얼마나 안 보이는 지 직접 확인해보고 싶었습니다. 여의도 환승센터와 수유역 일대, 강남역, 잠실역을 찾았습니다. 101번 간선버스와 9711A 광역버스 등에 변경된 표시판이 부착돼있었는데요. 숫자와 글씨가 가늘고 작게 바뀌어 직관적으로 인식하기 어려웠습니다. 버스 경로를 설명해주는 전면 행선판은 흰 바탕에 검은 글씨만 적혀 있어 말 그대로 ‘매의 눈’을 떠야만 했죠.
디자인 전공생 A씨는 “디자이너라면 저런 디자인을 내놓을 수 없다”며 행선지 표시판 디자인이 말도 안 된다고 비판했습니다. 그는 “A4 용지에 프린트 한 것 같다”며 “디자인에 대한 모독”이라고 덧붙였습니다.
시각장애인들이 더 쉽게 볼 수 있게 하겠다고 했지만 정작 한국시각장애인연합회에 자문을 요청하지 않은 점도 빈축을 샀죠. 누굴 위한 디자인이냐는 지적이 나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여론 악화되자 ‘원상복구’.. 서울시 디자인 심의 ‘전문성’ 지적도
그런데 이상한 점을 발견했습니다. 취재하면서 변경된 노선 번호 디자인과 바뀌기 전 행선지 디자인을 함께 부착한 버스를 여러 대 목격할 수 있었는데요. 버스 회사와 서울시에 확인 전화를 걸었습니다. 관계자들은 “민원이 셀 수 없을 정도로 빗발쳤다”고 입을 모았습니다.
서울시 측은 “광고사업자를 변경하는 과정에서 버스 조합이 준비한 디자인을 시범 운영해보기로 한 것”이라고 사업 배경을 설명했습니다.
사업 내용이 공개된 후 여론이 빠르게 악화되자 결국 서울시는 버스 조합에 디자인을 원래대로 돌려놓는 게 좋겠다고 지침을 내렸습니다. 10월 중순 쯤의 일입니다.
서울시에서 공공 목적으로 디자인되는 결과물은 ‘서울시 디자인조례’에 따라 심의를 받게 됩니다. 이번 건도 마찬가지였는데요. 서울시 디자인 심의에 의구심을 표하는 시각도 있었습니다. 30대 시민 B씨는 “서울시가 수많은 공공디자인을 심의할 수 있는 전문성을 보유했는지 의심스럽다”며 “심의만 잘했어도 이런 우스운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라고 지적했습니다.
안경업계 종사자 C씨는 “가시성을 높이는 데는 배경색, 자간, 행간, 빛 반사의 유무 등 여러 변수가 있을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잘 보이게 만들겠다고 두꺼운 글씨를 가늘고 작게 만드는 건 어지간해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비판 의견을 더했습니다.
새 사업의 시범 운영을 위해 표시판을 출력하고 붙이는 데 시간과 비용이 들어갔습니다. 원상복구하고 있는 지금도 그만큼의 시간과 비용이 들고 있죠. 아마 국민들은 이번 사업을 ‘역대급 탁상행정’으로 기억하게 되지 않을까요?
ocmcho@fnnews.com 조재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