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어가 얼마나 많이 잡히길래 재조명된 '방어진'

      2018.12.16 09:01   수정 : 2018.12.16 09:01기사원문

【울산=최수상 기자】 12월 제철을 맞은 방어(魴魚)의 인기가 식을 줄을 모른다. 이름난 대(大)방어 전문점마다 예약 전쟁을 치르고 있다. 이달 초 끝난 제주 모슬포의 최남단 방어축제는 올해로 18회째 이어가며 대표적인 겨울철 방어축제로 자리 잡기까지 했다.



그런데 방어의 원조는 따로 있다. 예로부터 방어가 많이 잡혀 이름까지 붙은 곳이다. 바로 울산의 ‘방어진’이다. 고수온으로 인해 올해 여름부터 방어잡이가 활황을 보인 데다 울산박물관이 특별전을 통해 재조명하면서 관심을 모으고 있다.

방어(魴魚)는 성어가 1m 넘게 크는 전갱잇과의 어류이다.
‘방어진(魴魚津)’이라는 지명으로 가장 오래된 기록은 조선 예종1년인 1469년에 편찬된 ‘경상도속찬리지’에 나온다. 당시 울산군에 설치돼 있던 방어진목장에 대한 설명에서다.

지명이라는 것이 주로 지역적 특성과 관련이 깊은 측면에서 방어 어획이 남달랐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지금의 지명 방어진(方魚津)은 일제강점기 때 조선총독부가 행정구역을 개정할 때 바뀌었다는 설에 무게가 실려 있다.


울산박물관과 울산동구지에 따르면 당시 방어진 앞바다의 풍부한 어족자원을 수탈하기 위해 일본 오카야마현의 히나세, 후쿠오카현에서 일본인들이 대거 이주했고 이후 전국 총 생산의 10%라는 엄청난 어획고를 올리며 방어진은 조선 식민지 1대 어항에 등극했다. 1930년대 방어진 앞바다는 세계 3대 정어리 어장으로 유명세를 떨치기도 했다.

일본인들은 동해안의 대표적인 어류인 고등어와, 삼치, 방어, 가자미, 정어리에다 고래까지 싹쓸이 해가며 부를 축척했다. 야시가네어업부의 창업자인 나카베는 방어진에서 잡은 고등어를 팔아 재벌로 성장하기도 했다.

방어에 대한 기록은 1916년 12월 울산군이 기록한 방어진 주요 어획고 자료에서 찾을 수 있다. 8~12월 사이 1만4800엔이라고 기록돼 있다. 고등어(22만7732엔), 고래(128마리 15만3656엔), 삼치(14만6295엔), 정어리(6만1900엔) 등에 비해 적었지만 방어는 일제강점기에도 기록에 남을 정도의 주요 생산물이었다.

방어진은 이같은 어획고 덕에 한 때 울산읍 보다 나은 살림살이로 인구와 규모, 소득이 크게 증가했다. 그러나 해방이 되면서 일본인들이 어선과 각종 어로도구 모두 챙겨 철수하는 통해 갑작스런 몰락의 길을 걷게 됐고 이를 빗대 ‘망어진(亡魚津)으로 불리기까지 했다.


하지만 1972년 세계 최대의 조선조인 현대중공업이 들어서고 공업도시로 급성장하면서 다시 번영의 길로 돌아섰다.

울산박물관의 특별전 ‘방어진’은 이러한 역사적 사실과 현대중공업의 기록들을 전시하고 있다. 지난 10월 말 개막 이후 현재까지 3만6000명이 넘게 다녀갔다.


울산박물관 조규성 학예연구관은 “조선업 불황으로 힘들어하는 울산시민들이 흥망성쇠를 거듭하면서도 꿋꿋하게 자리를 지켜 온 방어진을 한 번 되돌아보며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ulsan@fnnews.com 최수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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