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아리 집창촌서 25년째 약국 운영..그녀들의 마음에 약을 발라주다
2019.01.31 16:45
수정 : 2019.01.31 18:15기사원문
그가 파는 것은 약이었지만 치유되는 것은 마음이었다. 사람들은 몸이 아파도 그를 찾았지만, 마음이 아프거나 울고 싶을 때도 그를 찾았다. 자신을 찾아오는 아픈 사람의 손을 잡고 같이 울고 웃으며 얘기 들어주는 것을 좋아한다는 그. 머리는 하얗게 새었지만 미소 띤 얼굴 속엔 잘 웃고 잘 우는 소녀가 숨어 있었다.
■'엄마' 같은 마음으로
처음에는 그곳의 여성들이 그의 친절을 달갑지 않아 했다고 한다. 그러나는 지금은 가족과 같은 '약사이모'로 불린다.
"끊임없는 인내와 끝없는 사랑이 비결이라면 비결이지요. 그것은 어느 인간관계에서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제 높은 자존감도 한몫하는 거 같아요. 친절을 베풀었을 때 나를 훑어보고 '약이나 줘요' 하는 사람들도 당연히 있지요. 기분이 좋지는 않지만 그렇게 나쁘지도 않았어요. 그럴 수도 있겠다, 싶지요. 그리고 끊임없이 친해지려 시도를 했어요. 과자도 주고, 후원물품을 받아 나눠주고. 열번이든 스무번이든 먼저 다가가면 그 다음에는 편해지는 것 같아요. 다만 가장 중요한 것은 진심이어야 한다는 거예요. 이웃을 진심으로 걱정하고, 행복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있어요. 그렇게 하니까 시간은 걸렸지만 사람들과 많이 편해졌어요."
이씨는 지난해 코오롱그룹 오은문화재단에서 '제18회 우정 선행상'을 받기도 했다. 집창촌에서 약국을 운영하며 무료상담으로 소외여성을 돕고 있다는 이유에서다. 그는 "제약회사에서 후원이 들어오면 그 친구들에게 영양제나 간장약 같은 것을 나눠준다"며 "아픈 이들이 많아 약을 많이 먹는데 약 중독도 되니까 위험성을 알려주고, 어떻게 생활해야 하는지 등도 조언한다"고 말했다. 이어 "엄마 같은 잔소리를 해주는데 싫어하는 친구도 있고 감사인사를 하는 친구도 있다"며 "선물로는 통닭이 많이 들어온다"며 웃으며 전했다.
이씨는 이웃들에게 도서 대여도 하고 있다. 약국 한 쪽에는 '건강한 문고'라는 이름이 붙은 책장이 있다. 2주일에 두 권을 빌릴 수 있고, 보고 싶은 책이 있으면 신청이 가능하다고 적혀 있다. 이 밖에도 의약품안전사용 교육과 성교육, 봄·가을에는 천연비누 및 천연화장품 제작 수업도 진행하고 있다. 폐지 줍는 어르신들에게는 수시로 반찬도 만들어준다.
노숙자들을 위한 바하밥집도 후원 중이다. 이 씨는 "노숙자들을 위한 '희망의 백팩'이라는 것이 있는데 거기에는 샴푸나 타월, 비누 등 꼭 필요한 생필품이 담긴다"며 "주변의 후원 등을 받아 약국 창고에는 이들을 위한 생필품이 많이 모아져 있는데 바하밥집에서 정기적으로 수거하러 온다"고 설명했다.
■건강한 상담센터도 운영
이씨는 어떻게 '미아리 텍사스'에서 약국을 열게 됐을까. 그를 만나기 전 가장 궁금했던 질문이었지만 의외로 현실적인 대답이 돌아왔다. 그는 "당시 숙명여대 약대에서 혼자만 운동권이었다"고 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노동운동을 하는 남편을 만나 인천으로 갔다. 그곳에서 약국을 열고 지역활동을 하는 남편 뒷바라지를 했다. 남편과는 10년을 살고 헤어졌는데 어린 아들을 홀로 키워야 했다. 그래서 친정이 있는 하월곡동으로 돌아와 1994년 약국을 시작했다. 그는 하월곡동에서 태어나 자란 토박이로, 그가 어렸을 때만 해도 이 거리가 집창촌은 아니었다고 했다.
이씨는 "약대 동기가 40여명 되는데 경제적으로는 가장 가난하겠지만 아주 행복하다"며 "인천에서 살았더라면 어땠을까, 지금과 같은 삶이 아니겠지 싶다. 경험해보지 못한 삶이지만 지금만큼 행복했을까 싶은 생각이 든다"고 미소지었다. 그렇게 돌아온 하월곡동에서 이웃과 벗하며 25년째 약국을 운영하고 있다.
이씨가 운영하는 '건강한약국'에는 또 하나의 문패가 있다. 사회복지사 자격증을 따고 내건 '건강한 상담센터'라는 나무문패가 그것이다. 그리고 그 옆에는 '늘 여러분의 친구가 되고 싶습니다. 함께 아파하고 고민하고 나아가는 마을 지킴이!'라는 글이 붙어 있다. 문패를 걸어놓고 나니 꼭 이웃뿐 아니라 지나가던 사람들도 상담하기 위해 들어온다. 그들이 한결같이 물어보는 것은 '상담할 수 있나요' '돈은 얼마나 드나요' 두 가지다. 비용부터 물어보는 현실이 너무 안쓰럽다는 그다.
"전체 상담사례를 관통하는 건 외롭다는 것, 또 타자가 나를 알아주지 않는다는 것이에요. 인생을 산다는 게, 물론 타인과 더불어 살아가야 하지만 그 누구도 나를 대신 살아주지 않지요. 꼭 누군가가 알아줘야 살아갑니까. 지금껏 알아주지 않아도 열심히 살지 않았냐라고 반문하면 대성통곡하는 사람들도 있어요. 인간이 갖고 있는 본태적인 외로움에 대한 인식을 하고 산다면 삶이 좀 더 가벼울텐데 하는 생각이 듭니다."
■"집창촌 여성 처우문제 돕고 싶어"
이씨가 지금껏 가장 잊기 힘든 사람도 이곳에서 만났다. 지난 2005년 하월곡동 화재사고로 5명의 성매매 여성이 죽었는데 그 중 한 명이다.
"부활절이었고, 봄이었어요. 여기에 온 지 보름만에 화재사고로 세상을 떠났어요. 예뻤고, 몸도 작았어요. 아이와 남편이 있는 여성이었는데 남편과 이혼을 하려고 변호사 상담을 받자, '직업이 없으니 통장에 1억~1억5000만원 정도 있어야 딸아이 양육권을 갖고 올 수 있다'고 했답니다. 본인이 고아여서 도움받을 데도 없고 그래서 돈을 벌려고 여기에 왔대요. 외롭게 커서 '세상에서 유일한 인연인 딸아이를 직접 키우고 싶다'고 했던 사람이었는데.. 그렇게 온 지 보름만에 화재사고가 나서 세상을 떠났어요. 마음이 너무 아팠고, 그게 내 인생의 터닝포인트가 됐습니다."
그는 "당시 다들 성매매특별법으로 집창촌이 없어져야 한다고는 했는데 어떻게 없앨 것이냐에 대해서는 모두가 입을 닫았다"며 "그 일을 지켜보면서 이 친구에 대한 위로 글을 쓰고 싶어 글쓰기를 시작했다"고 설명했다. 그렇게 국민일보에 '미아리 서신'이라는 이름으로 칼럼이 연재됐고, 묶어져 책으로도 출판됐다. 이름이 알려지면서 정치를 권유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절대 정치권으로는 가고 싶지 않다는 그다. 대신 꼭 하고 싶은 일이 있다고 했다.
"집창촌이 이렇게 많이 모여있는 곳은 이곳이 유일해요. 다른 데는 없어지거나 소형화됐습니다. 이곳이 곧 재개발되고 헐리면 성매매여성들의 처우 문제가 나올 텐데 그때 민관협동으로 위원회나 지원단이 만들어지면 꼭 참여하고 싶어요. 내가 이들을 제일 잘 아니까요. 이 친구들이 사회에 어떻게 적응하고, 어떤 치료를 했으면 좋겠다 하는 생각을 종종하고 있습니다. 내게 있는 추진력과 인내력을 이 친구들의 이익과 권리를 위해 쓰고 싶어요."
이씨의 눈이 반짝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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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메일 wetogether@fnnews.com nvcess@fnnews.com 이정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