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만에 날아간 총리의 꿈, 태국 우본랏 라차깐야 공주
2019.02.16 05:59
수정 : 2019.02.16 05:59기사원문
"태국과 국민들을 위해 일하려던 나의 진실된 의도가 우리 시대에 일어나지 말았어야 할 문제를 초래한 점에 사과한다"
우본랏 라차깐야 태국 공주는 태국 선거관리위원회가 지난 11일 공주의 총리 후보 출마를 공식적으로 막은 뒤 다음날 자신의 인스타그램을 통해 유감의 뜻을 밝혔다. 그러나 오는 3월 24일 총선에서 그를 후보로 세워 5년간의 군부 독재를 끝내려던 탁신계 정당들은 공주를 정치에 끌어들였다는 이유만으로 선거에서 지게 될 판이다.
이번 사건의 주인공인 우본랏 공주는 올해 67세가 될 때 까지 순탄치 않은 삶을 살았다.
우본랏 공주는 어려서부터 스포츠에 재능을 보여 1967년에 태국 방콕에서 열린 동남아시안 게임(동남아 11개국의 국제 스포츠 대회로 당시엔 6개국 참가)에 아버지와 함께 요트 부문에 출전해 금메달을 땄다. 그는 이후 18세가 되던 1969년에 미국 보스턴으로 건너가 매사추세츠공과대학(MIT)에 입학해 핵물리학을 공부했다. 우본랏 공주는 학교 친구인 미국인 피터 젠슨과 사귀었고 1972년에 결혼하면서 왕족 신분을 포기했다. 태국 왕실은 왕족과 외국인과의 결혼을 금지하고 있다. 우본랏 공주는 다음해 MIT에서 학사 학위를 따고 캘리포니아주로 이사해 이름을 줄리 젠슨으로 바꾸었다. 그는 1975년에 로스앤젤레스의 캘리포니아대학에서 공중보건 석사 학위를 땄고 1992년에 에이즈 관련 질병으로 부모를 잃은 고아들을 돌보는 우본랏 재단을 세웠다.
그는 젠슨과 26년간의 결혼 생활에서 두 딸과 아들 하나를 얻었으며 1998년에 결국 젠슨과 이혼했다. 우본랏 공주는 이혼 후 샌디에고로 이사해 자식들을 키웠고 그 사이 시끼릿 왕비가 미국으로 가 딸을 만나기도 했다. 우본랏 공주 역시 왕족 신분을 상실하긴 했지만 종종 태국을 찾아 왕실 행사에 참석했고 2001년에는 태국으로 돌아왔다. 그는 귀국 이후 왕족 신분을 회복하지는 못했지만 왕실에서 '툰 끄라먼 잉(왕비의 자녀) 공주'라는 호칭을 받았다. 그의 아들은 2004년 인도양 쓰나미(지진해일) 당시 태국 카오락에서 휴가 도중 파도에 휩쓸려 목숨을 잃었다.
우본랏 공주는 2002년부터 청소년 마약 복용과 싸우는 비영리 재단을 세웠고 죽은 아들의 이름을 딴 장애아동 지원 재단을 비롯해 총 4곳의 재단을 운영하며 자폐증 환자 및 빈민들을 지원하는 사회활동을 하고 있다. 그는 현지 방송에서 직접 토크쇼를 진행하며 마약 반대 운동을 펼치는 등 미디어에 활발하게 등장했으며 2003년부터 홀로 혹은 딸과 함께 드라마에 출연했다. 우본랏 공주는 '기적이 일어나는 곳(2008년)', '나의 최고 보디가드(2010년)', '함께(2012년)'등의 영화에도 출연했으며 마약 반대 운동을 위한 콘서트 테마곡을 직접 부르는 등 음악활동도 했다. 우본랏 공주는 왕성한 소셜미디어서비스(SNS) 활동을 통해 젊은이들 사이에서 유명세를 탔고 그의 인스타그램 팔로워만 10만명에 가깝다.
우본랏 공주가 태국을 넘어 국제적인 관심을 끌게 된 것은 지난 8일 갑작스런 총선 출마 선언 때문이었다. 그를 총리 후보로 내세운 타이락사차트당은 이날 성명에서 우본랏 공주가 청소년 마약 복용 반대 운동을 펼치면서 처음으로 정치에 관심을 갖게 됐다며 그가 태국민들을 빈곤에서 탈출시키고 국민에게 좋은 미래를 주길 바라고 있다고 설명했다. 타이락사차트당은 현지 핵심 탁신계 정당인 프어타이당의 자매정당으로 오는 3월 총선에서 프어타이당과 합의해 선거구 후보를 조정한 상태다. 우본랏 공주는 지난해 러시아 월드컵에서 2006년 쿠데타로 정권을 잃은 탁신 친나왓 전 총리, 그의 친동생이자 마찬가지로 2014년 쿠데타때문에 오빠와 망명중인 잉락 친나왓 전 총리와 함께 다니기도 했다. 우본랏 공주는 8일 자신의 인스타그램을 통해 "나는 타이락사차트당의 후보가 되기를 결정할 수 있는 자유와 권리를 가진 평민"이라며 "나의 출마는 태국을 번영으로 이끌기 위해 희생하겠다는 진정성과 목적에 따른 행동"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나 그의 남동생인 마하 와치랄롱꼰 태국 국왕은 같은날 저녁에 성명을 내고 비록 우본랏 공주가 왕족 신분을 잃긴 했지만 총리 후보로 나설 수는 없다고 주장했다. 와치랄롱꼰 국왕은 "어떤 식으로든 고위 왕실 가족 구성원을 정치에 참여하게 하는 것은 오래된 왕실 전통 및 국가적 규범과 문화에 반하는 것이며 매우 부적절한 행동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이튿날 태국 왕실의 절대적인 권위를 무시할 수 없었던 타이락사차트당은 총리 지명을 취소했으며 우본랏 공주도 출마를 포기했다.
와치랄롱꼰 국왕이 누나의 출마를 막은 이유는 불확실하다. 우본랏 공주는 대중적인 인지도를 쌓긴 했지만 수십년간 미국에서 생활한 데다 정치적인 경험도 없다. 오히려 와치랄롱꼰 국왕 입장에서는 동생인 마하 차끄리 시린톤 공주가 더욱 위협적이다. 시린톤 공주는 아버지와 함께 어려서부터 개발 사업에 따라다니며 국민적인 인기를 끌어 유력한 여왕 후보로 꼽혔지만 와치랄롱꼰 국왕은 왕자시절부터 잦은 이혼과 사생활로 구설수에 올랐다.
결과적으로 우본랏 공주의 출마 실패는 이번 총선에서 군부 정당과 싸워야 하는 탁신계 정당들에게는 악몽이 됐다. 태국 선관위는 지난 13일 헌법재판소에 타이락사차트당이 왕실 인사를 총리 후보로 지명해 입헌군주제에 적대적인 행동을 했고 정당법을 위반했다며 당 해산심판을 청구했다. 만약 해산 결정이 내려질 경우 자매정당을 위해 선거구를 비워뒀던 프어타이당은 타이락사차트당 후보들이 해산 이후 출마가 금지되면서 코앞에서 의석을 뺏기게 생겼다. 후보등록기간 역시 이미 지났다. 하루 만에 무산된 공주의 총리 출마가 과연 태국 정부를 다시 군부에 넘겨주는 열쇠가 될 지는 이제 법원에서 결정나게 된다.
pjw@fnnews.com 박종원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