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년째 베트남 어린이 4000여명 무료수술 봉사..분당서울대병원 백롱민 교수

      2019.03.14 17:30   수정 : 2019.03.14 17:30기사원문


"또 간다는 생각도 못했어요. 그런데 벌써 24년째네요. 58개 지역 중 절반 정도를 돌았습니다. 내년엔 다시 하노이에 갑니다."

분당서울대병원 백롱민 교수(부원장)는 1996년 여름을 잊을 수 없다.

당시 인제대 백병원에서 근무하던 백 교수는 직접 꾸린 의료진을 이끌고 베트남 하노이의 108국군중앙병원으로 향했다. 얼굴이 망가진 채 태어난 어린이들을 모아 무료 수술봉사를 하기로 한 곳이다.
병원 곳곳엔 전쟁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었다고 한다. 총알이나 포탄 파편이 할퀸 흔적이 벽에 남아 있었다. 수술대 역시 100년쯤 돼 보일 정도로 낡아 있었다. 복도에는 부모와 함께 온 아이들이 자신의 이름이 불리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한 주에 200명' 강행군, 4000여명 웃음 찾아

백 교수팀은 1주일간 200명의 환자를 치료하겠다는 것을 목표로 잡았다. 하루 목표는 30여명. 의료진에겐 하루 목표를 채울 때까지 퇴근하지 말자고 했다. 당시 유럽 등 선진국 의료진도 무료 수술봉사를 하곤 했다. 하지만 보여주기식 봉사가 많았다고 한다. 백 교수의 의지는 명확했다. 아이 한 명이라도 더 치료해 얼굴에 미소를 찾아주고 싶었다.

의료진은 운 좋으면 오후 6시, 더 시간이 걸리면 저녁 10시까지 수술대에서 땀을 흘렸다. 냉방시설은 푹 찌는 날씨를 이기지 못했다. 수술실 곳곳에 얼음물 양동이를 놓고 선풍기를 틀었다. "당신들처럼 하드하게 일하는 사람들은 본 적이 없습니다." 하노이 현지 의료팀이 백 교수에게 건넨 말이었다. 이듬해에도 계속할지는 백 교수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한국에 도착하니 베트남 측이 보낸 팩스가 와 있었다. "내년엔 하노이가 아닌 다른 지역에서 수술봉사를 해달라는 요청이었습니다." 이듬해 여름에도 백 교수의 의료봉사단은 베트남에서 200여명의 아이들에게 웃음을 선물했다. 이번엔 돌아가기도 전에 내년 봉사를 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그렇게 24년이 흐른 셈이다.


■형제가 국내 순회진료하며 봉사 눈떠

백 교수의 봉사활동은 형 백세민 박사를 빼놓고 얘기할 수 없다. 백 교수는 형을 따라 의사의 길을 갔다. 인제대 백병원에서 전임의로 근무하며 당시 백세민 성형외과 과장의 지도를 받았다. 형은 1980년대에도 얼굴기형 수술의 권위자로 당시에도 세계적으로 알려져 있다. 형은 미국에서 잠을 설치며 쌓아온 의료기술로 미국에서 인정받은 의사였다. 하지만 한국에 기술을 보급하기 위해 귀국하는 길을 택했다. 당시 백병원에서 형은 엄하기로 소문나 있었다. 그 탓에 형 밑에 가기를 두려워하는 후배들도 있었다고 한다. 백 교수는 형과 15살 터울이다. 그도 독한 마음으로 형 밑에서 일했다. 형은 병원에서 그를 동생이 아닌 전임의(펠로)로서 냉정하게 대했다. 그래서인지 백 교수는 인터뷰에서 '형'이라는 말을 한 번도 쓰지 않았다.

백 교수가 누군가를 본격적으로 돕기 시작한 것도 그때부터다. 1989년부터 형을 따라 국내 지역 곳곳을 돌아다니며 얼굴기형 환자를 순회진료했다. 지역 보건소가 미리 얼굴기형 아이들을 모아줬다. 그때 얼굴기형 환자들의 고충을 피부로 느꼈다고 한다. 대다수 얼굴기형 환자들은 입술이 갈라지거나 입천장이 갈라져 있는 구순열·구개열이 많다. 하지만 부모가 부끄러워하거나 환자 본인도 대인접촉을 기피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우리나라도 1980년대에는 얼굴기형을 부끄러워하거나 감추려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이를 수술하지 않으면 아이가 사실상 사회생활을 할 수 없죠. 대다수가 몇 시간 걸리는 수술만 하면 인생 자체가 바뀌는 셈입니다."


■세민얼굴기형돕기회 차려 베트남으로

베트남 봉사활동도 국내 순회진료를 하다가 떠오른 아이디어였다. 두 형제는 국내봉사 경험을 바탕으로 우리보다 더 어려운 처지에 있는 나라를 도와야겠다고 생각했다. 당시 응우옌푸빈 주한 베트남대사를 만나 베트남에 구순구개열 환자가 많다는 이야기를 전해들었다. 무료수술을 계획했지만 문제는 자금이었다. 개인 사비를 털어도 한계가 있었다. 그때 SK그룹이 손을 내밀어 돈 문제가 해결됐다. "첫 봉사 때 베트남에 무얼 가져가야 하느냐고 물었는데 전부 다 가져오라고 하더군요. 가보니까 알겠더군요. 사실상 병원을 만들어서 가야 할 판이었습니다."

기업 후원을 받고 나니 베트남에서 정식 봉사활동을 시작해야겠다는 데 의견이 모아졌다. 백 교수와 여러 후원자들은 형의 이름을 따 '세민얼굴기형돕기회'라는 이름을 정했다. 영어 이름은 스마일 포 칠드런(Smile for Children)이다. 아이들에게 웃음을 찾아 주자는 의미다.

■형이 빠진 자리 오롯이 떠안아

위기는 초기에 한번 찾아왔다. 든든한 버팀목이던 형이 건강악화로 메스를 놓게 된 것이다. 첫해 하노이에 다녀온 후 베트남 봉사활동은 오롯이 백 교수의 몫이었다. 갑작스레 의료봉사단을 이끌려니 부담이 컸다. 형은 "사업을 계속할지 말지는 너 스스로 결정할 일"이라며 한발 물러섰다. 마음은 무거웠지만 그때마다 미소 짓는 베트남 아이들 모습이 떠올랐다고 한다.

하지만 기업 후원을 계속 받을 수 있을지 불안했다. 백 교수는 첫해 후원의 손길을 내밀었던 손길승 SK 명예회장을 찾아갔다. 손 회장은 오히려 "형님 뜻을 이어 사업을 이어나갈 수 있느냐"고 반문했다고 한다. 백 교수가 사업을 계속하겠다고 말하자 손 명예회장도 "끝까지 후원하겠다"고 약속했다. 현재도 베트남 봉사활동은 SK텔레콤이 후원하고 있다.

백 교수의 이타적 DNA는 어디서 물려받은 것일까. 혹시 부모 세대가 영향을 미친 것은 아닐까. 그는 덤덤하게 한마디를 던졌다. "아버지가 이런 말씀은 하셨어요. 의사가 될 거면 장기려 선생님처럼 해라." 고 장기려 박사는 6·25전쟁 이후 부산에서 병원을 세우고 봉사해온 사람으로 잘 알려져 있다. 한국에 최초로 의료보험제도를 정착시킨 선구자이기도 하다. 지난해 서울대 의대 동창회는 백 교수에게 '장기려의도상'을 줬다.
그의 20년 넘은 선행을 동창회에서도 인정한 셈이다.

ksh@fnnews.com 김성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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