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리스트의 추억

      2019.04.03 17:27   수정 : 2019.04.03 20:02기사원문

조금 오래된 이야기부터 하자. 드라마 '야망의 세월'에서 이명박 역을 맡았던 배우 유인촌이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을 할 때 얘기다. 유 장관의 취임 일성은 "이전 정권의 정치색을 가진 문화예술계 단체장들은 스스로 자리에서 물러나는 것이 자연스럽다"는 것이었다. "나름의 철학과 이념을 가진 인사들이 새 정권이 들어섰는데도 자리를 지키는 것은 지금껏 살아온 인생을 뒤집는 것"이라고도 했다.



유 장관의 공개적인 발언에도 몇몇 기관장은 버텼다. 김정헌 문화예술위원장과 김윤수 국립현대미술관장의 반발이 특히 거셌다.
김 위원장은 "이름까지 거론하며 그만두라고 해도 되나 하는 생각이 든다"며 "사퇴할 생각이 없다"고 했다. 김 관장도 "공모를 통해 정정당당하게 들어온 자리인데 나가라는 것은 말이 안된다"고 항변했다. 결국 정부는 운영 규정 위반 및 기금 운용 손실 등의 이유를 들어 해임을 통보했고, 두 기관장은 소송으로 맞섰다.

이명박정부 때에 비하면 박근혜정부 초기에는 비교적 조용했다. 정권이 바뀌긴 했어도 비슷한 국정철학을 가지고 있는 정부이다 보니 큰 잡음은 나지 않았던 듯하다. 그렇다고 기관장 물갈이에 두 손을 놓고 있었던 건 아니다. 전 정부 때 임명된 한국수자원공사 사장이 자진사퇴한 것을 신호탄으로 총 111개 기관에 대한 경영평가에 착수했다. 박근혜정부 청와대는 "MB 때처럼 억지로 내보내지는 않겠다"며 "경영지표를 근거로 한 '시스템 물갈이'를 추진할 것"이라고 했지만 기관장들이 느낀 압박감은 대단했을 것이다.

한데 박근혜정부는 엉뚱한 곳에서 사달이 났다. 이른바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사건'이다. 박정부 2년차인 2014년 여름부터 이듬해 1월까지 청와대 정무수석실에서 블랙리스트가 작성돼 문화체육관광부 산하기관 지원사업 등에 활용된 사실이 뒤늦게 밝혀졌다. 타깃은 전 정부가 임명한 기관장이 아니라 반정부 문화예술인, 즉 민간인이었다. 이 사건으로 김종덕, 조윤선 전 문체부 장관이 재판에 회부되고 리스트 선정 및 실행에 직간접적으로 간여한 공무원들이 징계를 받거나 옷을 벗었다.

요즘 문재인정부는 산하 기관장 동향을 살핀 '환경부 블랙리스트' 때문에 곤욕을 치르고 있다. 얼마전 부동산 스캔들로 자진사퇴한 김의겸 전 청와대 대변인은 이와 관련해 '블랙리스트란 먹칠을 삼가해 주십시오'라는 제목의 논평을 냈다. 그는 "블랙리스트란 말이 너무 쉽게 쓰여지고 있다"며 "블랙리스트의 부정적 이미지가 우리들 머릿속에 강렬하게 남아 있는데, 문재인정부의 인사정책에 그 딱지를 갖다 붙이지 말라"고 쏘아붙였다. "환경부에서 작성된 문서는 (블랙리스트가 아니라) 통상 업무의 일환으로 작성한 체크리스트"라고도 했다. 그러나 그의 해명이 국민 대다수를 설득했다고 보긴 어렵다.

환경부 블랙리스트를 '체크리스트'로 판단한 법원에 의해 김은경 전 환경부 장관이 일단 구속을 피했지만 논란이 완전히 수그러든 건 아니다. 김 전 장관은 지난 2일 피의자 신분으로 세번째 검찰 조사를 받았다.
그는 환경부 감사관실 컴퓨터에서 발견된 리스트에 '사직서 제출 유도' '업무추진비 사용내역 감사' '거부시 고발' 같은 단어들이 적혀 있는 이유에 대해 제대로 설명해야 한다. 그래야 전 정부와 이 정부가 적어도 똑같지는 않다고 변명할 명분이 생긴다.
그렇지 않으면 도긴개긴이라는 비난을 면하기 어렵다.

jsm64@fnnews.com 정순민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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