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문 9대째 키우고 지켜온 숲, 숙명처럼 이어갈 뿐입니다
2019.05.02 17:23
수정 : 2019.05.02 17:23기사원문
그를 보면 프랑스 작가 장 지오노의 소설 '나무를 심은 사람'의 주인공 엘제아르 부피에가 떠오른다.
소설 속 주인공은 가상의 인물이지만 여기 실제 수백년에 걸쳐 자손 대대로 숲을 가꾸며 지켜온 독림가 집안이 있다. 바로 부산 기장 철마면 '아홉산 숲'의 대표 문백섭씨(63) 가문이 그렇다.
■가문 9대째 내려오는 숙명
임진왜란의 공신인 문 대표 조상이 300여년 전 왕으로부터 기장군 일대 땅을 하사 받고 산을 관리하는 산역을 맡으면서 숲을 만들고 지킨 것이 가문 9대째 대대로 내려오는 숙명이 됐다. 미동 문씨 일가는 모여 살던 마을의 뒷산인 아홉산 52만㎡를 조림과 육림을 통해 정성껏 가꾸고 지켜내 명품 인공림을 만들어냈다. 수백년 된 금강송과 대나무, 편백나무가 어우러진 아홉산 숲은 들어서는 순간부터 찾는 이들에게 안식을 준다.
"종손이어서 귀하게 컸을 거라 생각하지만 할아버지 아래서 혹독하게 자랐어요. 매일 새벽 4시반이 되면 저에게 지게를 지고 따라오라고 하시면서 너는 나무를 키우는 일에 몸을 맞춰야 한다고 하셨죠."
동생은 해외로 유학을 떠나도 문 대표는 숲을 떠나는 게 허락되지 않았다. 1975년 서울의 치의대로 진학했지만 방학 때만 되면 어김없이 숲으로 돌아와 조부와 부친의 조림과 육림을 함께 했다. 한때는 숲에서 한발짝 떨어져 있고 싶었다고 그는 말했다. 30대 초반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아버지가 독림가의 업을 이어받았을 무렵에는 울산에서 치과를 개업하고 분주한 시기였다.
"치과의사로서 삶을 이어가면서 그저 숲을 지키는 데 드는 비용을 대는 것만으로도 역할을 다한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병원에서의 일에도 지쳐가던 1998년 홀연히 병원을 접고 중국으로 무작정 떠났다. 하지만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결국 2년여의 타지 생활을 접고 2000년 고향으로 돌아왔다. 울산에 병원을 다시 개업했지만 아버지가 그해 돌아가시면서 숲을 지키는 일은 문씨에게 고스란히 돌아왔다. 운명을 받아들이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20년 가까이 병원 일과 숲 가꾸는 일에 매진해오고 있다.
사실 아홉산 숲은 3년여 전까지만 해도 일반인에게 공개되지 않은 비밀의 숲이었다. 문 대표의 선조들은 사람들이 많이 드나들어 자연이 다치는 것을 우려했다. 그 역시 그런 유지를 따라야 한다고 믿었다. 하지만 지인인 윤종빈 영화감독의 끈질긴 요청으로 영화 '군도'를 찍게 되면서 일반인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했다.
"숲에 대해 연구하는 학자들이 와서 놀라더라고요. 이전에는 비영리를 목적으로 숲을 보고 싶어하는 어린이집이나 유치원 학생들에게만 개방을 했어요. 그러다 영화 촬영지로 알려지다 보니 일반인들이 찾아오기 시작했죠. 개방을 해달라는 요구가 많아졌어요."
■"결국, 미래의 다른 이들을 위한 일"
갑작스러운 사람들의 방문에 숲이 무분별하게 훼손되는 것을 보면서 문 대표는 제대로 개방하는 것이 낫다는 결단 끝에 지난 2016년 법인을 만들고 숲을 공개했다. 월요일에는 풀과 나무도 쉬어야 해서 휴장을 하고, 훼손한 나무들을 정리하고 간벌한다. 이 일을 위해 사재를 털었다. 이런 공로를 인정받아 지난해 10월에는 정부로부터 국민훈장 동백장을 받았다.
지난달 강원도에서 일어난 대형 산불을 보며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가슴이 아팠다는 그는 이번 기회를 통해 우리의 숲을 다시 구성하는 일에 도움이 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문 대표는 "과거 우리 정부는 소나무 등 하나의 수종만 심어 오히려 화재에 취약하고 땅을 산성화시키는 숲 구조를 만들었다"며 "변화해가는 기후와 환경에 맞게 다채롭게 나무를 심는 일은 결국 미래의 다른 이들을 위한 일이며 이런 일에 도움을 줄 수 있길 원한다"고 말했다.
jhpark@fnnews.com 박지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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